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이 때 종교지도자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이 여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본래 율법에 따르면 간음한 여자와 남자는 모두 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에도 나와 있고, 신명기 22장 22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명백하게 율법에 나와 있는 사안에 대해서 종교지도자들은 어찌 예수님께 여쭈어 보고 있는 것일까요? 매우 수상쩍은 상황입니다. 지금 이들이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이유에 대해서 6절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8: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앞서 말씀드린 대로 본래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사람은 모두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로마법에 따르면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사형 선고는 로마 총독만이 데릴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간음한 여인을 죽이면 로마법에 저촉됩니다. 반대로 로마법을 따라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이지 않으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와 같이 예수님을 난감한 상황에 밀어 넣어 예수님께서 어떠한 선택을 하든지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그를 시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아주 민감한 정치적, 종교적 이슈였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로마법을 어길 것인가? 아니면 율법을 어기고 로마법을 지킬 것인가? 예수님 주변에 서 이던 사람들도 이 간음한 여인의 판단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으로 소란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목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파 놓은 함정을 어떻게 반응하실까?’, ‘율법을 우선시하실까? 아니면 로마법을 우선시 하실까?’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6절 후반절을 보니,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7절을 봅시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이 파 놓은 정교한 함정에 예수님께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시고 땅에 글씨만 쓰고 계시자, 계속해서 예수님께 선택을 강요하며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율법을 따라야 합니까? 로마법을 따라야 합니까? 어서 고르십시오!” 다그쳐 묻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대답에 종교지도자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악한 의도를 깨트려 버리셨습니다. 당황스러움에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무슨 글을 쓰셨는지 성경이 기록하지 않아 우리는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때 직접 손으로 쓰신 유일한 글 ‘십계명’을 예수님께서도 쓰시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어찌 되었든 예수님의 물음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예수님을 고발하고 잡아가려던 종교지도자들이 찬물을 퍼 부은 듯 할말을 잃은 채 조용해졌습니다. 사람들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에 가책을 느껴 하나 둘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에게 죄가 없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결국 이 현장에는 예수님과 여자만 남게 됩니다. 그러니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곧 죄인이라고 인정한 셈입니다. 10-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홀로 남은 여인에게 그를 고발하고 정죄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여자에게 그녀를 정죄하던 자가 아무도 없느냐고 물으시자, 여자는 아무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도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간음한 여인을 대하는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의 태도가 서로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이 여인을 태하는 태도는 정죄였습니다. 그녀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고, 돌에 맞아 죽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향해 “여자여”하고 부드럽게 부르셨습니다. 곧 사람들이 던질 돌에 맞아 죽을 것에 두려워 떨고 있던 여자에게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도 다른 사람들처럼 죄가 있으시기에 그녀를 정죄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녀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고,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그녀를 돌로 칠 수 있으셨으나, 하나님의 권세로 죄인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에서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다시 죄의 구렁텅이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주님과 함께 의를 행하며 살아가고 마침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율법에 따르면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간음한 여인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 것과 같이, 오늘날 죄악으로 인해 죽어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하여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12절을 봅시다.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홀로 남은 여인에게 그를 고발하고 정죄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자기 소개가 총 7번 등장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그 중 예수님의 두 번째 자기소개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 비추시는 ‘세상의 빛’입니다. 그 빛은 생명을 주시는 빛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갖게 될 것입니다. 참 빛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면 어둠의 영역에 속하지 않게 되고, 빛의 영역에서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율법에 따르면 판결을 위한 법적인 증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원고를 제외하고 최소 2명의 증인으로부터 증언이 더 있어야 합니다. 이를 근거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증언은 자기 자신에 관한 것임으로 참되지 아니하다고 비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주장이 신뢰성이 없고 신빙성이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증언이 확실하다고 반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 스스로에 대해 증언하여도 그 증언은 참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역의 기원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어둠의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 이후 부활하심으로 구원 사역을 완성하시고 이후 승천하여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지식을 예수님은 가지고 계시기에 주님은 그 자신의 증언이 참되고 확실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 불쾌감을 느끼며 예수님을 붙잡아 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20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아직 정하신 때가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주님의 몸에 손 하나 대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 비추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세상의 빛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악의 현장에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본래 죄를 지은 모든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것이 순리이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어둠에 있지 아니하고 빛에 있으며,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어찌 경배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 하루 세상의 빛으로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십시다. 우리 구주 예수만을 믿고 따라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