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31 살아갈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창세기 12장 1-9절)

혹시 스카이다이빙을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높은 고도의 상공을 활공하다가 지상 가까이에서 낙하산을 펴서 착륙하는 스포츠를 가리켜 스카이 다이빙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스카이다이빙을 한다고 한 번 상상해 봅시다. 달력에 표시를 해둔 날짜가 다가올수록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하늘에서 자유 낙하를 할 것에 대한 기대와 염려가 섞여 있습니다. 드디어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당일이 되었습니다. 13,000 feet (약 4km) 아파트 800층 높이에 비행기가 다다랐다. 비행기에서 밖으로 나가야 하는 시간이다. 비행기 문이 열렸다. 눈 앞에 푸른 하늘이 있고 하얀 구름이 안개처럼 지나간다.
높은 기압에서 오는 바람 소리에 말도 옆 사람이 말하는 소리는 커녕 내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순간 덜썩 겁이 납니다. 낙하산이 안 펴지면 어떻하지? 착지할 때 위험한 곳에 떨어지면 어떻하지? 예상하지 못한 대형사고가 일어나면 어떠하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뒤에서는 이제 비행기 밖으로 나가라고 내 등을 서서히 푸시하고 있다. 비행기 밖으로 나가는 그 한 걸음을 걷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담력이 필요할까? 비행기 밖으로 나가면 어떤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삶에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기 위해 내딛여야 하는 그 한 걸음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 새해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우리는 도통 알 수 없기 때문이다. Covid는 종식이 될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인가? 마스크를 벗게 될 날이 과연 올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신종 변이 바이러스로 인해 더욱 생활을 조여야 하는 것인가? 사실 이와 같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중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비행기 밖으로 나가는 스카이다이버들처럼 우리 가운데는 그러한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용기를 내어 인생의 발걸음을 한 걸음을 내딛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 그와 같은 용기 있는 삶을 보여준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볼 것이다. 그가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은 아주 오래 전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사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고, 그를 복의 근원이 되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어 오늘날 셰계에서 가장 큰 종교들 중 3개의 종교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모두가 아브라함을 중요한 인물로 생각한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아들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짓는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약속을 이루셨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그 결말을 다 알고 성경 이야기를 볼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서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약속을을 아브라함의 시대, 아브라함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 1-3절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암에게 그가 평생 살아온 삶의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지역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이 어떻게 생긴 곳인지, 그의 가족이 먹고 살기에 적합한 땅인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이 당시 사회는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땅에 묶여 살았다.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사 가서 사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본문 속 그의 나이 일흔 다섯의 노인이다. 아내 사라의 나이는 65세이다.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날 20대 30대의 젊은 나이가 아니다. 무릎도 허리도 예전 갖지 않고, 쉽게 피곤할 나이라 먼 여행을 가기 보다는 정착한 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느긋하게 여생을 보낼 나이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고향 땅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고대 사회에서는 이른 나이에 결혼했기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결혼한지도 적어도 50년은 되었을 것이다. 지난 50년간 하나님은 이 부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들을 도대체 어떻게 성취하실 것인가 아무런 가닥도 보이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아들 낳기를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시고, 그가 자식을 낳아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이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황당할 것입니다. 주님 제 나이 일흔 다섯인데 평생 살아온 고향을 떠나라고요? 오늘날처럼 이민 가는 것이나 이사 가는 것이 교통/통신의 발달로 이전보다 많이 활발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일흔 다섯의 노인이 평생 살아온 고향을 떠나는 일은 어렵다. 아브라함은 자식 낳기를 포기한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그러니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약속을 들었다면 얼마나 믿기 어렵고 당황스럽겠는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 될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힌트도 주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실 땅에 대한 정보도 충분하게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평생 살아온 고향 땅을 떠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곳으로 모험의 여정을 떠났다. 무엇이 아브라함으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주었을까?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이 가진 이해가 아브라함이 그와 같이 반응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깊게 이해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그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제가 이번 주 주일예배가 끝난 후 여러분을 붙잡았습니다. “집사님, 죄송하지만 저랑 어디 좀 같이 가주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목사님 어디를 가야 하는데요?” “집사님, 정말 죄송하지만 도착하기 전가지는 제가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를 믿어주십시오. 집사님께서 꼭 함께 가주셔야 합니다. 집사님에게 득이 되지 결코 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저랑 같이 가주시면 나중에 집사님이 ‘아하! 이것 때문에 그러셨구나?’하고 방긋 웃으시며 저에게 미소 지으실 것입니다.” 주일 오후에 집에 급히 가야 하는 상황은 아닙니다. ‘우리 목사님께서 평상시 이런 일을 부탁할 분이 아닌데 싶으면서도 분명 내가 모르는 무슨 상황이 있나 보다.’하고 저를 믿고 저를 따라와 주셨습니다. 제가 차를 운전하고 아주 낯선 도시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난생 처음보는 한 고급 레스토랑 앞에서 내립니다. 눈이 휘둥그래져서 이게 무슨 일인가 합니다. 문을 열고 레스토랑에 들어갑니다. 불이 다 꺼져 있어서 어둡습니다. 그 때 갑자기 불이 켜지면서 “서프라이즈!”하고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알고보니 집사님 가족 분들이 은퇴를 축하한다고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그제서야 무릎을 치며 “아, 이것 때문에 목사님이 나랑 같이 가자고 하셨구나?” 하고 이해합니다.
자, 그런데 한 번 이 이야기를 바꿔 생각해 봅시다. 주일예배가 끝나고 파킹장에 갑니다. 평생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남자가 여러분을 붙잡습니다. “집사님 죄송하지만 저랑 어디 좀 같이 가주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아니 선생님 누구신데 제가 당신하고 같이 가야하지요”? “집사님, 정말 죄송하지만 도착하기 전까지는 제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를 믿어주십시오. 집사님께서 꼭 함께 가주셔야 합니다. 집사님에게 득이 되지 결코 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저랑 같이 가주시면 나중에 집사님이 ‘아하! 이것 때문에 그러셨구나?’하고 방긋 웃으시며 저에게 미소 지으실 것입니다.” 아무리 집에 가서 급히 할 일이 없는 주일이라 한들,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낯선 사람의 차에 탈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오히려 속으로 ‘저 사람 이상한 사람이다. 범죄자 아니야? 혹시 정신 나간 사람 아니야?’하고 의심하고 불신하지 않겠습니까?
차에 타서 함께 가달라는 똑같은 요청인데 왜 전혀 다른 반응이 일어날까요? 관계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제 차를 타 주신 이유는 제가 여러분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란 신뢰가 있고, 김영목 목사라는 사람의 인격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에, 지게 여러분에게 해악을 끼치는 나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란 관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 다시 아브라함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험의 여정을 떠났습니다. 무엇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수 있는 담대함을 주었을까요? 그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해악을 끼칠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신뢰가 있었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킬 신실하신 분이란 사실을 믿는 관계성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창세기 12장 이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 왔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조상들은 그의 아버지 데라를 포함하여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어쩌면 이전까지 아브라함도 우상을 섬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은 많이 당황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꺼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선택하였습니다. 그가 떠난 모험의 여정은 그 자신이 가진 어떤 경험이나 지혜와 능력에서 비롯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정을 떠나게 된 계기는 오로지 그를 찾아오시고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선하신 주님께서는 밝아오는 2022년 새해에도 우리들의 삶을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새해를 살아갈 힘과 용기를 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선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우리들도 믿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더욱 확실하게 이해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삶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더욱 북돋아 줍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 라디오 방송 진행자인 죠니 에릭슨 타다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믿음은 안개가 끼어 있는 머나 먼 미래의 일들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도 인용구절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수록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존과 확시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특정한 사명을 위하여 부르실 때, 우리는 더이상 그분의 음성이 낯설게 들리지 않습니다. 대신 친숙하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