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입다의 승리 이후 에브라임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입다의 승리를 축하해주기는 커녕 왜 자신들을 전쟁에 함께 데리고 가지 않았느냐는 말도 안되는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사실 에브라임이 이와 같은 투정을 부린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전에 기드온이 300명의 용사들과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에도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을 찾아와 왜 전쟁에 나갈 때 우리는 안 불렀느냐고 이야기를 하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렇다면 에브라임 사람들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에브라임 지파는 유다 지파를 제외하고 가장 크고 강한 지파입니다. 그런데 자신들 보다 작고 약한 지파 출신인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민족의 영웅으로 부상한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입다의 공을 세워주지 않고 도리어 자신들은 전쟁에서 제외시켰다고 말하며 입다를 궁지로 몰며 위협했습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민족의 영웅이 된 입다를 도리어 반역자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실상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 나가기 전 에브라임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에브라임은 암몬을 함께 공격하자는 입다의 요청을 묵살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암몬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입다는 어쩔 수 없이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에브라임의 도움 없이 길르앗 사람들만의 힘으로 암몬과 싸워야 하는 역경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에브라임 사람들이 자신들은 왜 안 불렀느냐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으니 입다 입장에서는 크게 화가 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2-3절 말씀을 봅시다. “(12: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다툴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고로 (12:3) 내가 너희의 구원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붙이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날 내게 올라와서 나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고” 여기서 입다가 말합니다. “내 백성과 나는 암몬 사람들과 큰 싸움을 치렀소. 나는 당신들을 불렀지만, 당신들은 나를 도우러 오지 않았소. 나는 당신들이 나를 도울 뜻이 없는 것으로 알고, 내 목숨을 걸고 암몬 사람들과 싸웠소.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셔서 그들을 물리치게 해 주셨소. 그런데 이제 와서 당신들이 나와 싸우겠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의 요청을 거부했던 자신들의 비겁함을 감추기 위하여 비열하게 도리어 입다를 반역자로 모함하고 있던 것입니다. 정말 야비한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가 전쟁에서 승리한 입다를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4절을 보면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와 그가 속한 길르앗 사람들을 어떻게 모욕했는지 나와 있습니다. “(12: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에브라임은 말하기를 “너희들은 원래 에브라임과 므낫세에서 도망친 자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길르앗 사람들과 입다를 에브라임 지파에서 도망친 망명자로 취급하며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 동쪽 지역을 점령했을 때 모세가 이들에게 땅을 줌으로써 정당한 방법으로 이 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길르앗은 므낫세의 자손으로 에브라임과는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브라임 사람들은 마치 길르앗과 입다가 민족의 배신자라도 되는 듯이 그들을 조롱하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이는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에브라임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이 곤궁에 처해 있을 때 외면하였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비겁한 마음과 길르앗과 입다가 민족의 영웅으로 떠오른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 때문에 이런 못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열 두 지파 중 누구보다 덩치는 크고 힘은 강한 지파인데, 마음은 정말 옹졸한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도 에브라임 족속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를 위한 온전한 마음으로 헌신을 다하여 열심히 섬기는 한 집사님이 계십니다. 사역은 많고 힘이 듭니다. 다른 성도들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지만 다들 바쁘다고 외면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집사님이 장로로 직분자 피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회 일 좀 도와 달라고 하면 바쁘다고 핑계 되며 도망치기 바빴던 사람들이 이 집사님을 뒤에서 흠잡습니다. “저 집사님 사실 저렇게 열심히 교회에서 일한 거 저거 다 장로 되고 싶어서 그런거야.” 얼마나 끔찍한 사람들입니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잘되거나 주목받는 것을 견디기 싫어하는 이런 시기심과 질투심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런 말 한 마디가 열심히 주를 위해 헌신하는 귀한 분들의 마음을 얼마나 상처받게 합니까? 지금도 에브라임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어찌 그 사람들의 평판이 두려워 이 귀한 주의 일을 두 손 놓고 지켜만 보고 있겠습니까? 오해를 받아 억울하고 마음이 힘들어도 견뎌내야 합니다. 상대방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포기하면 나중에는 더 큰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에브라임 같은 이들의 공격에도 시기와 질투 혹은 조롱과 위협에도 끝까지 참아내고 주의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은 또 다시 새로운 은혜와 힘을 주십니다. 억울함도 끝내 풀어주십니다.
느헤미야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도시가 황무지가 되었다는 소식에 몇일을 금식할 정도로 조국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바벨론 왕실에서 누릴 수 있는 안위와 부귀영화를 모두 다 내려놓고 그 멀고 험한 길을 지나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사비를 탈탈 털어 예루살렘 성벽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원수 산발랏과 도비야는 느헤미야가 성벽을 짓는 것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는 것이라고 모욕하고 조롱했습니다. 사람들을 매도하여 느헤미야를 손가락질 받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원수들의 조롱과 위협에도 도망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사명을 끝까지 수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느헤미야는 존귀한 자로 칭해지고 있으며 그와 함께 성벽을 쌓은 모든 백성들이 큰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에브라임 같은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조롱과 위협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 정리해 주십니다. 다 심판하시고 갚아 주십니다.
기드온의 경우에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시비를 걸었을 때, 부드러운 말로 그들을 위로하여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그는 에브라임과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에브라임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결국 도망치기에 바빴습니다. 요단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강을 건너가야 했기에 길르앗 사람들은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누구든지 강을 넘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조사하여 에브라임 사람임이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어떻게 에브라임 사람임을 구별했습니까? 에브라임 사람들이 도망치면서 “강을 건너게 해 주시오”라고 말하면 길르앗 사람들은 “당신은 에브라임 사람이 아니오?”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면, 길르앗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쉽볼렛”이라고 말해 보라고 했고, 그 사람이 만일 “십볼렛”이라고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들이 그를 잡아다가 요단 강 나루터에서 죽였습니다.
우리나라 경상도 사람들은 쌀 발음을 잘 못합니다. ‘쌀’을 ‘살’이라고 발음하여 읽습니다. 지난 2013년도 당시 국회부의장을 맡은 이병석 부의장이 본회의 진행 중 ‘쌀소득’을 ‘살소득’이라고 발음하고, ‘소싸움’을 ‘소사움’이라고 발음하자, 그 자리에 있던 240 여명의 국회의원들이 웃음을 참지 못해 본회의장이 웃음바다로 변해버렸습니다. 이병석 부의장의 고향이 경상도 포항입니다. 그는 그 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이 발음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서울 사람들에는 쉬운 쌀 발음도 경상도 사람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것이죠.
비슷한 경우로, 에브라임 사람들도 쉽볼렛을 발음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길르앗 사람들은 누구나 발음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에브라임 사람으로 간주하여 그를 요단 강 나루턱에서 잡아 죽였던 것입니다. 이 때 죽은 에브라임 사람의 숫자만 4만 2,000명입니다. 민수기 26장에 나오는 인구조사 때 에브라임 지파 20세 이상 남자의 숫자가 3만 2천 5백명이었습니다. 그 때 이후 약 300년이 지난 후 사건이라고 해도 이는 에브라임 지파 가운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기와 질투로 상대방을 조롱하고 위협하는 사람들은 그 끝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다툼과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들의 비겁함과 야비함은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교회를 분열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들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 같이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 내에서 영향력이 높아지거나 주목받는 것을 시기하거나 질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에브라임을 죽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열심과 섬김도 인정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구하십시오. 또한 혹시 우리 주변에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처럼 열심히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는 우리들을 향하여 조롱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인내해야 할 차례입니다. 억울해도 인내하십시오. 때가 되면 모든 진실은 밝혀지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다하는 충성된 자세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