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다는 길르앗의 아들입니다. 1절을 보면 입다는 ‘큰 용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천사가 기드온을 부를 때 ‘큰 용사’라고 불렀는데 똑 같은 칭호를 입다에게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백성이 찾고 있는 지도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다에게는 치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생의 아들이었습니다. 입다는 장자였으나 동시에 서자였습니다.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입다의 이복형제들은 그가 기생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를 길르앗 땅에서 쫓아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입다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아무것도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이처럼 입다는 형제들의 차별을 겪으며 그들의 압박과 무력으로 인해 결국 고향에서 추방당하게 됩니다. 3절 말씀을 보면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들에게 쫓겨난 입다에게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여기서 ‘잡류’는 부랑자들 혹은 건달패들을 가리킵니다. 또한 여기 사용된 ‘출입하였다’는 ‘약탈하다’란 의미가 있어 아마도 입다가 건달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며 도적질을 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병사들을 이끌고 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길르앗 가운데는 그들을 전쟁에서 이끌어 줄 대장 역할을 할 만한 인재가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길르앗 장로들은 형제들의 차별로 인해 추방당한 입다가 떠올랐습니다. 그리하여 장로들은 입다를 찾아갔습니다. 이전에는 입다가 아픔을 당할 때는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길르앗의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들의 발에 불똥이 떨어지자 부리나케 입다를 찾아갔습니다. 7절에 입다의 불만을 들어보십시오. “(11: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입다는 자신이 이복 형제들에게 쫓겨날 때 길르앗의 장로들도 그를 무시하였고, 그가 사회에서 법적 권리나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였음을 언급했습니다. 길르앗 장로들은 이전에 입다가 이복 형제들에게 공격 당할 때 그를 보호하기 위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아니하였던 것이죠. 오히려 이들도 이복형제와 한통속이 되어 입다를 미워하고 그를 쫓아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가 가장 필요할 때 그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를 찾아가 위로한 적 없습니다. 그러나 암몬의 침공으로 인해 정작 자신들이 입다를 필요로 하게 되자, 길르앗 장로들은 한 마음으로 입다를 찾아갔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상대방이 나에게 유익한 존재인가를 따져봅니다. 만일 상대방이 나에게 불이익을 가져줄 것 같은 사람이라면 그를 멀리합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신 기준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의사로 소개하시며,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시가 필요하지 않고, 병든 사람에게야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밝히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간관계는 독특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섬김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섬기는 종의 자세로 살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인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간관계는 상대방과의 만남이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를 계산하며 갖는 만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이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인가? 내가 이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는 영적 유익은 없을까?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도와주고 섬길 수 있을까?”하는 자세로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또 지금도 그 풍성하신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들을 통해 흘러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속 상황을 살펴보면, 적군 암몬은 이미 길르앗에 진을 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미스바에서 적군과 대치 중인 상황입니다. 암몬 자손의 공격은 임박해 오는데, 길르앗 장로들은 전쟁의 수장이 될 자를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그 적임자로 입다가 나온 것이죠. 그들은 속히 입다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장로들과 입다 사이에 권력에 대한 거래가 오고 갑니다. 6절 말씀을 보면, 장로들은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장관’의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11:6)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그런데 사실 사사기 10장 18절을 보면 이들은 길르앗 거민의 왕이 될 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기생의 아들이며 추방자인 입다가 적임자 명단에 오르자 왕 대신 장관직을 주기로 생각을 바꾸었던 것이죠. 장로들은 입다의 출생 신분과 그가 도적 떼의 우두머리라는 사회적 신분 때문에 그가 길르앗의 왕의 자리에 오르는 일을 내키지 아니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로들은 입다가 군대의 사령관 즉 장관 직도 분에 넘치는 자리라 여기며 쉽게 승낙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입다는 장로들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여전이 이전에 자신을 쫓아내었던 길르앗 장로들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었던 것이죠. 입다는 장로들이 자신이 장자로서 가진 권리를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낼 때 방관하고 묵인하였음을 언급하며 자신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협상에서 그가 우선권을 가지게 된 것이죠. 이에 장로들은 입다가 자신들의 제안을 거절하자, 8절에 가서야 드디어 그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경우 그를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로 삼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의 운명이 걸린 상황입니다. 암몬에게 패하면 앞으로 끝을 알 수 없는 긴 세월 동안 모든 이가 암몬 족속의 비참한 노예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입다는 공동체의 앞날 보다는 자신이 이 전쟁을 통해 수장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9절을 봅시다. “(11: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여기서 그가 여호와를 언급하는 것은 믿음의 고백이라기 보다는 이를 통해 장로들이 후에 다른 말하지 아니하도록 그가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가고 있는 것입니다. 장로들은 당황했으나, 암몬 족속이 이제라도 쳐들어 올 수 있는 다급한 상황이라 앞뒤를 따져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입다의 협상 카드를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 의식은 사라지고, 자신의 이익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사회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입다를 보호해야 했던 길르앗 장로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그를 쫓아 냈었고, 동족을 보호해야 했던 입다는 자신이 길르앗의 수장 자리에 오를 것을 위해 전쟁을 앞두고 협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자리를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복을 주시고, 은혜와 평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고 주의 백성을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