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2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 (출애굽기 33장 7-17절)

 

시내 산 아래서 모세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형 아론을 충동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무시하고 금송아지 우상에게 절하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트리고 우상을 섬기자,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시고 이스라엘을 진멸하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최대의 영적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대로 두면 민족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 앞에 진멸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이런 위기가 찾아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내 산 아래서 여전히 우상을 섬기며, 그 앞에서 춤을 추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축제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오직 모세 한 사람만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찾아온 절체절명의 위기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결국 시내 산 아래로 내려간 모세는 금송아지 우상을 깨트려버렸습니다. 모세는 우상을 불태어 가루로 만들었고, 그 가루를 물에 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시도록 하였습니다. 레위인들은 허리에 칼을 차고 진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돌아다니며 우상숭배에 심취해 있는 자들을 죽였고, 그 숫자가 무려 3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상숭배라는 큰 죄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큰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여전히 진멸하려고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들을 용서해 주실 것을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모세는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 산에서 진멸하시면, 애굽을 포함하여 세상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의 섬기는 신 여호와는 그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낼 만한 힘이 없고, 또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성취할 능력도 없다고 조롱할 것이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며 하나님의 명예와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진멸하려는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함께 시내산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이스라엘 보다 앞서 보내사 가나안 족속들을 무찌르고 그 땅에서 쫓아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들의 자손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에 만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가신다면 도중에 범죄한 이스라엘을 진멸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만족해합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 타고, 연봉도 꽤 괜찮은 직장에서 편안하게 지냅니다. 자녀들도 좋은 대학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좋은 배우자 결혼해서 잘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하심은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물질적 축복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승인하신 것이라 생각하며,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가정하며 살아갑니다. 현실의 필요가 채워지니 삶 속에서 결핍으로 느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지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지 못하고 다만 ‘아마도 함께 하시겠지’하고 머리 속에서 스스로를 위안하며 가정하고 살아가는 것만큼 비참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하심 속에서도 결핍을 느끼지 못해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의 상황에 만족해버린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유다의 ‘히스기야 왕’입니다. 그는 죽을 병에 걸렸다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모든 영적인 문제가 다 해결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히스기야 왕이 병들었다가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에서 사절단이 찾아왔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유다 왕국의 재력과 영광을 자랑하기 위해 예루살렘 국고와 보물들을 바벨론의 사절단들에게 모두 다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히스기야에게 벌을 내리사 그가 바벨론 사절단에게 보여준 모든 것이 다 그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며, 하나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의 자손으로 태어난 자들도 바벨론에 사로잡혀가 그곳에서 환관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옷을 찢고 회개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습니까?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대가 전해준 여호와의 말씀은 지당하신 말씀이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진노하신 말씀이 선포되는 가운데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띄고 있었습니다. 왜 히스기야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서 내리실 이 모든 재앙이 자신이 죽은 후 다음 세대에 벌어질 일들이며,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평화롭고 안전할 것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자신의 교만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벌을 받았음에도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를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하는 현재의 상황에 만족해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빠진 영적인 함정입니다. 현재 내 삶이 평안하면 아무런 영적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정도, 회사도, 자녀들도, 교회도 특별히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상 가운데 오는 그 만족감으로 인하여 심각한 영적 결핍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지금 평안한 삶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평안함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증거로는 불충분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의외로… 의외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확신하지 못하고 다만 가정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단순히 ‘나는 예수님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시겠지.’하고 가정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하루, 일주일, 한달, 일년 그렇게 평생을 교회 속에서 영적으로 방황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내 천사를 보내서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겠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자녀들에게 주기로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겠다. 바로 이 지점… 바로 이 지점에서 모세는 ‘거룩한 불만족’을 느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없으시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강력한 불만족이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이스라엘이 여전히 엄청난 위기 가운데 빠져 있음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 족속을 무찌르고 약속의 땅에 들어와 평안히 살아간다고 해서 위기가 살아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이는 그 어느때보다 가장 큰 위기 상황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인식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지금 함께하고 계심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가지 못하면서도, 다만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시겠지’하고 가정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그와 같은 타협점이 바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교회는 운영이 됩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찬양도 부르고, 봉사도, 선교도 다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없다는 사실을 곧 느끼게 될 것입니다. 바로 교회 안에서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을 살아집니다.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회사도 가게도 큰 문제가 없고 자녀들도 잘 큽니다.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강력하게 체험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확신하지 못하고, 다만 그럴 것이라고 가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강한 문제의식을 느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더 이상 함께하지 않으신다는 이 상황을 이스라엘이 해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로 인식했습니다. 다른 문제들도 이것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철저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세와 같이 현재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부재하심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 교회에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자신들의 삶을 더욱 구별했습니다.

모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였습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진영 밖 먼 곳에 장막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회막’(the tent of meeting)입니다. 모세는 회막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진영은 금송아지 우상숭배 죄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 위하여 더욱 구별된 삶을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진영 밖에 회막을 세웠습니다. 이처럼 현재 자신이 처한 영적인 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발견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구별하기 위해 힘을 씁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나름대로 개인적인 문제와 교회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여러가지 시도와 노력들을 합니다. 수천명이 운집하는 전도 집회, 부흥 집회를 기획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후원을 받기도 하고, 교회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부재하심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인 사람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거룩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은 수백명, 수천명이 모이는 집회를 조직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조용하게 홀로 자신의 삶을 구별하여 주님을 간절하게 찾았습니다. 사람들에게 홍보하거나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요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하게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200백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집회를 가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마음만 먹었으면 남녀노소 하나도 빠짐없이 모였을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큰 부흥집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사람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삶을 구별하여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갈망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삶을 프로그램으로 조직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죄악으로부터 거룩하게 구별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교회사를 찾아보면 모세와 같이 거룩한 불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의 대응은 한결 같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구별했습니다. 감리교를 창시한 존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홀리 클럽’을 만들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기도에 힘썼습니다. 부흥의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독교에 특별하게 역사하신 순간들을 찾아보십시오. 그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깊은 문제인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기 위한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따로 구별했던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 모세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 민족의 위기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형 집회를 조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초라한 장막 하나를 취하여 진 밖에 쳐 두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가나안 땅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풍요롭게 산다 한들, 우리 삶에 주님이 부재하시면 우리는 이미 죽고 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회막에서 하나님께 무엇을 간절히 구했을까요? 그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3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3: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은 모세가 지금 이 기도를 하기 바로 2구절만 올라가면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성경이 기록한 이후 그가 이러한 기도를 드렸다는 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안에는 주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끝없는 갈망 바로 이것이 모세와 같은 영적인 거인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거룩한 갈증이 있습니다. 어찌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겠습니까? 평생을 신학교에서 가르친 신학교 교수라도, 50-60년 충직하게 목회한 목회자라도 어찌 그 크신 하나님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시대에 하나님에 대한 정보는 갖고 있을지는 몰라도, 정작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어 머리로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감히 다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교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주님을 더 가까이 만나고 싶어했고,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영적 거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만나기를 사모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바로 이와 같은 영적인 갈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질문에 대해서 ‘네’라고 대답한다면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대로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이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갈증을 자신의 삶을 구별하기 위해 힘씁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 삶을 거룩하게 구별하기를 힘쓰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두번째로 모세는 그가 하나님의 은총 입음을 확신케 하는 증거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모세는 그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면, 천하 만민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별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로 하나님의 함께 행하여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6절을 읽겠습니다. “(33: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통해 가나안 족속을 물리쳐 주시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러한 삶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총을 베푸신다는 나타내는 확실한 표징을 구했습니다. 모세는 세상 사람들과 이스라엘이 구별될 수 있는 특별한 은총,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도록 그들과 함께 행하여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심을 확신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증거를 어디에서 찾으십니까? 혹시 마음의 평안, 경제적 부유함, 자녀들이 잘 되는 것 같은 예에서 가운데서 그 증거를 찾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이 세상의 불신자 가운데서도 나타납니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것들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증거로 내세운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우리보다 더 평안한 삶, 더 큰 경제적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결코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모세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이 전쟁에서 이기는 일이나 땅을 정복하는 것은 이방민족들 가운데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임을 그는 깨닫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과 구별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특별한 은혜를 구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었습니다. 오순절 제자들에게는 방언이 나타났습니다. 사도들에게는 병고침의 역사가 함께 했습니다. 제가 지금 위에서 말씀드린 현상들을 동일하게 추구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마다 깨닫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삶 속에는 세상 사람들이 봐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강력한 증거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모세는 바로 이와 같은 강력한 은혜를 구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와 같은 모세의 간구는 현재 자신과 공동체가 영적 결핍이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구할 수 있습니다.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러한 은혜를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나안 민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에서 만족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가정의 평안, 안정적인 교회 운영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모세와 같은 영적인 거인은 그러한 상태에 만족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그 이상의 은혜를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는 확실한 표징을 간구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가정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를 간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 우리가 처한 영적 상황 속에서 결핍을 느끼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총의 필요를 깨닫고 구별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자들은 결코 그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따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같이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구하고, 주님의 함께하심을 확신케 하는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 가운데 인간의 지혜와 방법이 아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함께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