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5 치명적인 시험 (출애굽기 32장 1-14절)


지난 1992년 [디즈니]에서 제작한 만화 영화 [알라딘]는 개봉과 함께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알라딘과 요술램프]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요술램프에서 나온 요정 지니가 주인공 알라딘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꿈만 같은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그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 줄 수 있는 그런 요술 램프가 있다면 정말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알라딘과 요술램프] 이야기는 인간이 지어낸 상상 속 허구일 뿐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지금까지도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이유는 인간 본연의 마음을 잘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소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 소원을 이루고 싶어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마음 속 간절히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소원이 있다는 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자가 되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성공하는 것, 유명 연애인이 되는 것, 좋은 집에서 사는 것, 높은 권력을 가진 위치에 올라 가는 것, 인류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만한 큰 업적을 세우는 것,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는 것? 죽은 아버지, 죽은 어머니가 다시 살아나는 것 등등 이루고 싶은 꿈은 저마다 다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 안에도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처음에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초신자 단계에서는 하나님을 마치 요술램프 속 지니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바를 구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듣고 응답해 주시는 것이 신앙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할수록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써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종으로써의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인생의 목표가 내 자신의 꿈과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이제는 자신의 탐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더 이상 내 자신의 유익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내 자신의 꿈과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요술램프 속 지니처럼 생각하고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하나님의 꿈과 소원을 위하여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을 창조하신 참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 자신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만들어 낸 가짜 신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워줄 가짜 신을 직접 만들어 내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기 위하여 시내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시내 산 위에서 40일간 머물게 됩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간 후 아무런 소식도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 모세가 산을 올라가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닌지, 그가 하나님 앞에 실수를 범해서 죽은 것은 아닌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광야에서 모세가 돌아오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불안함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대고 붙잡고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세의 형 아론에게 찾아가 그에게 자신들을 위하여 신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과 얼마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직접 전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2계명을 설명하시며 분명하게 이 세상 그 어떤 형상으로도 하나님을 우상화 하지 말고 또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숭배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셨을 때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드시 지키겠다고 대답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이스라엘은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아론에게 우상을 제작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결국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 금으로 된 송아지 우상을 제작하게 됩니다.
아론은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우상 앞에 제단을 만들었고, 다음 날을 절기로 선포하여 온 백성이 금 송아지 우상을 경배하도록 하였습니다. 4절 말씀을 봅시다. “(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금 송아지 우상을 섬길 때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새로운 신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바로 이 금송아지 우상이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낸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며 금 송아지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그 앞에서 엎드려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에게 절하면서도, 자신들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당당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신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착각하며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얼마나 황당합니까? 또 이와 같이 하나님을 우상화 하는 모습은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두려운 ‘우상숭배’가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본래 ‘우상’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조각하여 그것을 경배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금과 은, 나무와 돌을 깎아 피조물의 형상으로 신을 만드는 것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그저 내가 믿고 싶은 하나님, 내가 원하는 것을 모든지 다 들어주는 하나님이라 생각하며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고 섬기는 내면 속 ‘우상’도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우상은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기독교는 내가 만들어 낸 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닙니다. 내 탐심과 내 탐욕을 채워줄 신을 만들고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기독교는 오직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만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왜곡된 하나님,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의 하나님을 섬기는 경우 그는 잘못된 신앙의 길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지난 3년 간 예수님을 충성되이 따라다니던 가룟 유다가 어느 날 갑자기은 30냥에 예수님을 배신했습니까? 유다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기대하고 생각하던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다윗과 같이 말을 타고 칼을 들고 병사들을 이끌고 로마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줄 구원자 메시아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칼을 들고 전쟁을 하실 생각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을 찾아 한 사람씩 위로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과 크게 벗어나자, 실망한 유다는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기도로 예배로 나아갈 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실망하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까?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리의 탐욕이 만들어 낸 마음 속 가짜 하나님 곧 우상이 있다면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나를 섬기는 것이,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를 위해 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해 지음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것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우상을 숭배하자,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3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여태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실 때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7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언급하시며 “너의 백성이 부패하였도다”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단절이 생겼음을 암시합니다. 금 송아지 우상을 제작하고 숭배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진멸하려고 하셨습니다.
밭을 가는 소가 일하기 위해서는 소에게 멍에를 씌어야 합니다. 그러나 소 중에 고집이 센 녀석은 멍에를 쓰지 않으려고 버티고 저항합니다. 이처럼 주인의 명령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소를 향하여 ‘목이 곧았다’고 표현합니다. 오늘 본문 9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멍에를 쓰지 않으려고 저항하며 주인의 손길을 뿌리치는 고집 센 황소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고 반발하는 미련한 소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패역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더 이상 참으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내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0절 말씀을 봅시다. “(32: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의 후손들을 하늘의 별들처럼 셀 수 없을 만큼 큰 민족으로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범죄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진멸하고, 모세를 제2의 아브라함으로 선택하여 그를 통하여 새로운 민족을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습니다. 비록 7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더 이상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시지 않았지만, 11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다시 한번 “주의 백성”이라고 언급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큰 죄를 범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달라는 간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하게 여기사 그들을 향한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그들을 진멸하려는 뜻을 돌이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무슨 의로운 행동을 했거나, 그들에게 어떤 공로가 있음으로 그들을 멸절하려는 뜻을 돌이켜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오직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의지하여 주께서 택하신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호소하며, 그들을 향한 심판의 뜻을 돌이켜 주시길 간구했습니다.
만일 이대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진멸하게 된다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비웃을 것입니다. “아, 이스라엘이 섬기던 그들의 신 여호와는 그의 백성들을 광야에서 몰살시키려고 애굽에서 데리고 나왔구나?” 12절을 봅시다. “(32: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특별히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멸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하나님을 비웃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모세는 그러한 일이 벌어짐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고, 심판의 뜻을 돌이켜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또한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13절 말씀을 봅시다. “(32: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그들의 자손으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그들의 후손들이 하나님께서 주실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누리며 살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맹렬한 진노로 진멸되면 그 약속이 성취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는 신이라 비웃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짓말쟁이 신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이 성취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이 여기서 진멸되지 아니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클라이막스는 바로 이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14절을 봅시다. “(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본래 우상을 제작하고 우상에게 제사 드리고 숭배라는 엄청난 죄악을 지은 이스라엘을 진멸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는 그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로를 쏟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악 가운데서도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혹시 오늘 우리가 모세처럼 간절하게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해야 할 사람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구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오늘 본문을 보며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바뀔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정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은 한 번 계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진멸하겠다고 말씀하셨다가,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먼저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어머니들은 아이가 한끼라도 굶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일 아이가 장염에 걸렸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래서 금식을 해야 합니다. 그때에는 아이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해도 어머니가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음식을 먹지 못하게 막습니다. 자, 그리고 아이가 장염이 다 나으면 어떻게 합니까? 다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밥을 맛있게 차려줍니다. 그렇다면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가 변화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동일하게 아이를 사랑합니다. 다만 아이의 상태에 따라서 어머니가 그에 맞게 지혜롭게 태도를 취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심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의 변화에 따른 하나님의 다른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사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정의로우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경배하자 그들을 진멸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죄사함을 구했을 때 자비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변화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영적 상태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변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뀐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변화함에 따라 하나님의 대응이 다르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바뀐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함이 없으시고 항상 동일하십니다.
우상숭배라는 엄청난 죄로 인해 하나님의 크신 진노를 받고 진멸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영적 실태를 잘 나타내 줍니다. 우리 중 자신의 죄악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본래 우리들도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보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