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성막에 놓일 분향단을 제작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분향단의 위치는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 앞에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 아론에게 매일마다 아침과 저녁 총 두 번 분향단 위에 향기로운 향을 태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절을 봅시다. “(30:7)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 여기 말씀을 보면 아론이 아침마다 향을 드릴 때 하나님은 그것을 향기로운 제사로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저녁에도 하나님께 분향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께 향을 피워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향을 피우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기도해야 합니까? 아침과 저녁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가 뜰 때에, 해가 저물 때에 기도했습니다. 이는 하루의 시작과 주님께 기도 드리며 시작하고, 하루의 끝을 주님과 기도하며 마쳤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8절을 보면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즉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영원히 끊임없이 드려야 합니다. 어제 기도했다고 오늘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어제는 어제로의 기도로 살아가고, 오늘은 오늘의 기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밤낮으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저는 우리 성도님들을 기도의 삶으로 도전하고 싶습니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영혼은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저는 무시로 기도합니다! 저는 길을 걸어 가면서도 기도하고, 운전을 하면서도 기도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무시로 하는 기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무시로 기도하는 것이 전부라면, 왜 하나님께서 오늘 분향을 하는 일에 있어서 정해진 때에 하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나약하기에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걸을 때마다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운전할 때마다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무시로 기도하는 것에만 만족하는 것은, 기도 안하고 살아가는 날도 아무런 문제없이 지나간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기도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복음서를 보면 주님도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도 시간을 잘 지키셨는지, 복음서에는 그가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를 배반한 가룟 유다도 캄캄한 한 밤 중에도 언제, 어디로 가면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을 찾을 수 있을 지 알고 있었습니다.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에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은 기독교의 오래된 전통입니다.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여러분들만의 기도 골방을 만드시고, 기도 시간을 정해 놓으십시오. 깊은 차원의 기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7절을 다시 봅시다. 여기 말씀을 보니 아무 향이나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향기로운 향”을 주님께 분향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분향단에 드릴 “향품”을 제조하는 규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원하는 아무런 향이나 하나님께 바칠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께서 지시해 주신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 향만 분향단에 드릴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나님께서 무조건 다 좋아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방법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님의 주기도문에 기도하는 방법이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 자신의 탐심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도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 전체를 100%라고 볼 때,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한 번 점검해 보십시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용한 양식이나 우리의 필요와 간구를 위한 기도 제목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없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방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간구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할 때 ‘내 기도가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는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6절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6절에는 분향단을 놓는 위치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분향단을 어디에 두었습니까? 먼저 말씀을 한 번 봅시다. “(30:6)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6절을 보니 분향단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증거궤 맞은편에 다가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지성소에 증거궤가 있고, 그 맞은 편 성소에 분향단이 있고 이 둘 사이에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 짓는 휘장 곧 커튼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분향단은 증거궤 바로 앞에 있는 셈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가까이에서 귀 기울여 들어 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기도해도 아무런 소용 없더라”,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얺더라”하고 말하며 기도의 무용론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기도를 귀 기울여 듣고 계시다고 가르쳐줍니다. 기도를 상징하는 분향단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증거궤 바로 앞 맞은편에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가장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며,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 바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기도의 유익은 기도 응답에만 있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그 시간 자체가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성숙해 질수록 기도 응답보다 기도 시간 자체를 더욱 즐거워하게 됩니다. 하나님 만나는 즐거움이 기도하는 가운데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성숙한 기도의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11절부터는 회막 봉사에 쓰일 ‘속전’을 드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속전’은 히브리어로 ‘코페르’란 단어입니다. 이는 ‘갚다’ 또는 ‘가리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전을 여호와께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구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값을 갚아 주시고, 그들의 죄를 가려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바로 ‘속전’입니다. 그런데 여기 15절 말씀에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생명의 속전으로 내는 값이 같습니다. 사람의 소유가 많다고 해도 그의 생명의 값어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사람이 그의 소유가 적다고 해서 그가 가진 생명의 값이 낮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그의 소유나 지위에 상관 없이 누구나 다 똑 같은 생명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다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가난하고 생활이 어려운 형편인 사람도 속전을 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속전을 드리는 성도의 기본 의무를 결코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날마다 찬양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께 감사의 속전을 드리십시오. 아침마다, 밤바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기도로 하나님과 깊게 교제하며, 주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며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드릴 삶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으로 세워지고, 기도로 인한 깊은 교제와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로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