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절을 보면 “이른 아침”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새벽 매우 이른 시간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잠들어 있는 시간이거나,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아침은 얼마나 분주한 시간입니까? 이와 같은 이른 시간에 ‘큰 소리로 이웃을 축복한다’는 행위 자체는 매우 부적절하고 어울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14절에서 말하고 있는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이웃을 축복”하는 것은 아첨으로 하는 형식적인 축복을 가리킵니다. 분주하고 아직 잠이 덜 깬 시간에 찾아와 부자연스럽게 큰 목소리로 상대방을 축복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것이고 가식적인 행동입니다. 이와 같이 진심이 결여된 인사치레식의 축복은 상대방에게 좋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욕을 하고 저주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듣기 좋은 말, 상대방을 높여주는 말이라 할지라도 진실성이 결여된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그 말은 도리어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첨하는 말, 마음에도 없는 부적절한 칭찬을 하지 말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향한 마음에도 없는 가식적인 축복은 우리가 피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거짓과 가식은 제해버리고 참되고 진실한 언어생활을 해야 합니다.
15절을 봅시다. “(잠 27:15) 다투는 부녀는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다투는 부녀’란 남편을 존중하는 태도가 없어, 늘 남편의 흠을 찾아 잔소리하고 소란을 일으키는 아내를 말합니다. 이렇게 해도 짜증을 내고, 저렇게 해도 화를 내는 여인입니다. 잠언 전체로 보면 조급한 성격을 가지고 쉽게 화를 내는 사람입니다. 온유하고는 거리가 멀고, 분노를 잘 제어하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지붕에 구멍이 뻥 뚫려 집을 한 번 떠올려보십시오. 비 오는 날에는 재앙 아니겠습니까? 쉬지 않고 남편과 다투는 여인이 바로 그와 같다는 뜻입니다. 일단 지붕이 뚫린 집 안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방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엉망이 될 뿐입니다. 16절을 보면 성품이 거칠고 화를 잘 내는 아내를 제어하려는 것은 바람을 제어하려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제어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또한 오른손으로 기름을 어떻게 움켜쥐겠습니까? 미끄러운 기름은 손에서 다 빠져나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을 무시하고 늘 다투는 아내를 잠잠케 하려는 시도들은 헛된 노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아내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겠습니까? 남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쉽게 화를 내고 분노하는 남편을 둔 가정도 늘 불화가 가득합니다. 반대로 성품이 온유하고 부드러운 것은 가정에 끊임없는 웃음소리와 화목함을 가져줍니다.
17절입니다. “(잠 27: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합니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모난 인격은 다듬어지고 성숙해집니다. 하나님은 아담 혼자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하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사람은 경쟁과 협력을 통해서 서로 성장해 갑니다. 경쟁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선한 경쟁도 있습니다.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선의의 경쟁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쟁은 아름답고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혼자 뛸 때보다도 여러 다른 선수들과 함께 뛸 때 더 좋은 기록을 내는 것도 선의의 경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은 협력을 통하여 성장합니다. 나 자신보다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치고 이끌어 줄 때 인간은 더욱 풍성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협력을 통해 인간은 성장하게 됩니다. 친구들과의 교제는 우리들을 더욱 나은 사람으로 만들며 더욱 온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철이 철을 만나 마찰할 때 서로 더욱 날카롭게 변해가듯이, 친구는 서로 교제를 통하여 인격이 향상되고 서로 더욱 나은 존재로 성장해 갑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상대방의 존귀함을 알아가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배려와 예절을 지키는 것이 인간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18절입니다. “(잠 27:18)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 채소들은 대부분 파종 후 1년 이내에 열매를 거둡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와 같은 과실수들은 열매를 맺기까지 여러 해를 기다려야합니다. 그러니 이 나무를 지키는 자는 오랜 세월 동안 땀과 노력을 기울여야 비로소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인을 위해서 나무를 지키는 자는 주인과 함께 그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솔로몬은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을 위해 땀 흘리며 노력할 때 그 수고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이기에 충성을 다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인을 잘 섬기는 시종에게 영화가 있다는 말은 주인에게 충성된 종을 주인이 반드시 보상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주군을 섬긴 장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를 세울 때 제일 먼저 그들에게 높은 지위와 영광이 돌아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대장이요 주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는 주의 종들을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과 큰 영광을 보상으로 주실 것입니다.
19절을 봅시다. “(잠 27:19)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 이전에는 거울이 없었기에 사람이 자신의 생김새를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거울이 있어도 오늘날의 거울과는 달리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잔잔한 물가에 허리를 숙여 보면 물 위에 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거울을 통해서 내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게 되듯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 자신이 진정 어떠한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제 시간 속에서 “아, 내가 알고보니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있는 것이죠. 사람마다 서로 생각과 가치관의 차이가 있기에 평소에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잘 인식하지 못하다가도, 전혀 다른 생각과 마음을 가진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선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이처럼 타인과 함께 교제하며 관계를 가지는 것은 인간의 성숙함에 큰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20절을 봅시다. “(잠 27:20)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음부와 유명이란 죽은 자들이 사후에 가는 세상을 말합니다. 음부와 유명이 만족이 없다는 말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어 음부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해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도 만족함을 모릅니다. 인간의 눈이 가진 탐심은 끝이 없습니다. 요즘에 하루 종일 넷플릭스, 유튜브, 드라마, 영화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의 눈은 만족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만족함을 모르는 눈의 탐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파멸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눈의 탐심을 채우는 것에서는 참된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집안을 더 많은 가구로 채우고, 내 몸을 더 비싼 액세서리로 꾸민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참 된 만족은 없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싫증을 느끼게 되고 또 다시 갈증과 공허함을 느끼게 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눈의 탐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나님 안에서 만족과 행복을 발견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21절입니다. “(잠 27:21)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 사람이 칭찬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이나 역경을 통해서만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들뜨고 가볍게 만드는 칭찬을 통해서도 사람의 본심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삶에 찾아오는 형통함이나 이웃의 칭찬에 마음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의지하여야 하듯이, 형통과 칭찬 속에서도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