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말씀을 보면 ‘육선’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고기로 만든 반찬’이란 뜻입니다. 고기로 만든 반찬이 식탁에 가득하지만 다툼이 있는 집보다는 오래되어 먹기에 딱딱한 떡 한 조각밖에 없으나 화목한 가정이 더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유로서 가난하더라도 화목한 가정이, 부유하고 불화한 가정보다 낫다는 뜻입니다. 돈이 많은 부자인데 부부끼리 하루가 멀다 하고 부부싸움 해서 결국 이혼했고, 자녀들은 부모와 함께 하기 싫어해서 멀리 떠나 평생 연락도 안하고 지낸다고 생각해봅시다. 얼마나 외로운 사람입니까? 과연 인생의 끝에서 돈이 그 사람에게 위로가 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가난하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해주고 감싸주는 부부가 있습니다. 자녀들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경하고 서로 사랑합니다. 천금이 부럽지 않은 화목함이 가정에 깃들고 있는 셈입니다. 가까운 가족, 친구, 이웃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누리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물질적 번영을 누리며 호사스런 음식을 먹지만 가족, 친구, 이웃들과 관계가 끊어지고 불화가 가득한 사람보다 더 낫습니다. 물질보다 사람을 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부하지만 불행한 것보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2절을 읽겠습니다. “(잠 17:2)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그 아들들 중에서 유업을 나눠 얻으리라” 어느 한 주인에게 슬기로운 종이 있습니다.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고 성실하게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그 주인에게는 아버지의 명예를 깎아내리고 부끄러움을 끼치는 미련한 아들이 있습니다. 이 경우 주인은 슬기로운 종에게 그 미련한 아들의 훈육을 맡기고 종을 아들의 후견인으로 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또한 때에 따라서는 주인이 자신의 재산 중 일부를 충성심과 성실함을 겸비한 종에게 나눠주는 경우들도 혹 있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이와 같은 사례를 언급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며 지혜와 슬기로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었습니다.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왕이 되어 12지파를 다스릴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슬기로운 장로들의 말은 무시하고, 미숙한 젊은 친구들의 조언을 따름으로 10지파를 종 여로보암에게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자신이 처한 형편과 처지에 불평하고, 게으르게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슬기로운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잠 17: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은이나 금과 같은 금속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은광석 또는 금광석을 뜨거운 도가니와 풀무에 넣어 용해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궤사한 생각들, 숨은 죄악들을 제거하시고, 강하고 굳은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사람의 마음을 연단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연단하십니까? 우리 삶에 여러가지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때로는 슬픈 사건과 사고, 몸의 질병, 힘든 고난과 역경, 고독과 외로움, 실패의 쓴 맛 등 다양한 인생의 과정들을 통하여 우리들을 연단하십니다. 순도 높은 은과 금이 귀하게 사용되듯이,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 죄악과 불신을 제거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인생으로 빚으십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이 우리 삶에 있지만 포기하지 마시고,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모든 고난과 눈물을 끝내주시고, 우리들의 삶을 더욱 존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가난한 자와 부자 이 모두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부자들의 갑질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부자라는 이유로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들을 괴롭히고, 욕하고, 폭행하는 일들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의 소유가 많고 적음이 그 사람의 가치를 결코 좌우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평생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치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가장 가치 높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물질의 적고 많음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분복의 차이일 뿐, 그 사람의 가치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이웃의 재앙이나 아픔을 보고 기뻐하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은 남이 자신보다 잘 되는 것에 질투와 시기를 느낍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잘 안 되면 속으로 쾌감을 느끼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불행을 보며 행복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러한 자에게 형벌을 내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9절을 봅시다. “(잠 17:9)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세상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들도 실수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용서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우리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 행동을 하는 사람, 욕을 한 사람에 대해서도 인내하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입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자가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이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큰 사랑을 이루는 자입니다. 주기도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악행을 저지른 자들을 용서해줄 것을 원하십니다. 심판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용서해주고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기분, 느낌, 감정을 따라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 진리요, 싫은 것은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말씀과 믿음을 따라 살아갑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만이 진리요, 죄악의 모든 길은 거짓임을 고백합니다.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지 말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더 나은 삶입니다. 그 복된 길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