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우리의 인격을 대변합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줍니다. 성경은 의인의 언어와 악인의 언어가 다르다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자의 말은 부드럽고 온유합니다. 지혜로운 자의 말은 화가 난 사람을 상대해도 온유한 말로써 상대의 마음을 풀어줍니다. 그러나 미련한자는 화가 난 사람에게 똑같이 화를 냄으로써 더욱 노를 격동 시킵니다. 지혜로운 자의 입에서는 상대방에게 유익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말로 상대방에게 격려와 위로를 줍니다. 말로써 선을 베푸는 것이죠. 그러나 미련한 자는 그 입에서 미련한 것만 나옵니다.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함으로써 상처를 주고, 위협과 해를 가합니다. 이처럼 의인과 악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내용이나 영향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말은 상대의 분노를 잠재우고, 상처를 치료하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외로운 자들을 위로하고 공허한 자에게 삶의 의미를 전해줄 수 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우리 입에서 나오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삶의 지극히 작은 것까지도 다 보고 계십니다. ‘X-ray’나 ‘MRI’로 봐도 안 보이는 것이 사람의 생각과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은밀한 것까지도 다 훤히 보고 계십니다. 3절에 ‘감찰하다’는 말은 ‘자세하게 관찰하다’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생각과 동기를 자세히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특별히 3절에 ‘어디서든지’라는 표현에 주목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람들 모르게 나쁜 일들을 계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르시게 무언가 계획할 수는 없습니다. 보는 사람은 없어도, 하나님은 불꽃 같은 두 눈으로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속으로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다 자세하게 관찰하고 계십니다.
여리고 성을 공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아간은 남몰래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전리품을 훔쳐 자기 장막 밑에 파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죄악을 아시고 그를 심판하셨습니다.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는 그의 주인 선지자 몰래 나아만 장군에게 돈과 옷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보시고 그를 심판하셨습니다. 초대 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도 기억하고 계십니까? 이 두 부부는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쳤으나, 그 중 일부는 몰래 감추었고, 교회를 속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했던 사도 베드로는 이 부부를 책망하며 그들이 하나님을 속였다고 말했고, 두 부부는 같은 날 심판을 받고 죽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비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 한 일도 주님께서는 밝은 대낮 광장에서 한 것처럼 훤히 다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서 친히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다면 감히 쉽게 악을 행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요셉을 떠올려 보십시오. 보디발의 아내는 집에 아무도 없다고 그를 유혹하며 보는 사람 없으니 죄를 짓자고 유혹했으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고 표현하며 유혹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보는 사람 없다고, 아는 사람 없다고 생각하고 죄를 짓는 것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내 모든 행위를 알고 계신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는 우리가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하는 것이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작은 일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것 하나도 유심히 지켜보고 계심을 안다면, 타인을 괴롭히고 상처주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듣기 좋으실 말들, 어려운 이웃들에게 힘과 소망을 주는 말들, 상처를 감싸주는 말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5:5)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미련한 사람과 슬기로운 자의 차이는 부모의 훈계를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했다고 한 번 가정해 봅시다. 동종 비즈니스에서 10년, 20년 지내온 전문가의 조언이라면 귀를 세우고 듣지 않겠습니까? 전문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새로 시작하는 우리 비즈니스의 교훈으로 삼지 않겠습니까? 부모가 많이 배웠던, 못 배웠든지 간에 부모도 살아온 세월로 인해 나름대로 배우고 깨달은 인생의 원칙과 지혜가 있기 마련입니다. 한 마디로 어린 자녀에 비하면 부모는 세상에 대해서는 전문가인 셈입니다. 그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훈계하는 것이니, 자녀에게는 부모의 훈계가 얼마나 유익하겠습니까? 물론 “부모는 항상 옳고 자녀의 주장은 항상 틀리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직 판단력이 부족하고 경험이 미숙한 어린 자녀가 지혜로운 부모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그들의 영적 아비 되시는 하나님의 훈계를 받아들이고 있는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훈계 즉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주의 말씀에 경청하는 것은 생명의 샘을 곁에 두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미련한 자는 사막의 오아시스를 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는 고통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훈계를 받아들이는 자는 더욱 더 풍성하고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보다도 먼저 정직한 삶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잠 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가장 좋아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제사를 미워하시고 정직한 자의 기도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제사보다 순종이 우선이고, 제사보다 정직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을 더욱 기쁘게 합니다. 정직하지 않은 자의 제사는 하나님 보실 때 혐오스러운 거짓 제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를 요구하시기에 앞서 우리의 정직하고 진실한 삶을 명령 하셨습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5:9)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9절에 사용된 ‘미워하다’란 표현은 지극히 강한 혐오의 감정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을 쓰레기와 오물처럼 혐오하며 지극히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반대로 9절에 사용된 ‘사랑하다’란 표현은 열정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적극적인 태도로 선을 행하며, 의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일상 속 우리의 언어와 행동을 자세하게 관찰하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악인에게는 벌을 주시고, 의인에게는 상을 주십니다. 우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이웃들에게는 사랑이 되고, 우리 자신에게도 영적으로 복이 되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