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를 두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한 내용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인류의 죄를 위해서 오실 메시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수난 당하시는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마암아 우리들의 죄는 사하여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갑작스럽게 임의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탄생하시기 수 백 년 전부터 미리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주신 구원 계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제 예루살렘을 향하는 자신에게 어떤 사건들이 일어날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32-33절 말씀입니다. “(눅 18: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눅 18:33)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도 제자들에게 하나도 숨김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요한아, 야고보야, 내 모든 제자들아! 나는 이방 사람들에게 넘어가고, 조롱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할 것이다. 그들은 채찍질한 뒤에,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모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뜻대로 이루어진 사건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은 타의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께서 자발적으로 선택하신 수난과 죽음이었습니다.
34절 말씀을 보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다 말씀해주시고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중에는 이 말씀의 의미를 하나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34절에는 이것을 가리켜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감취어지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읽고, 주야로 묵상할 때마다 그 말씀들의 비밀을 깨닫게 도우시고 인도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의 죽음이 바로 우리들의 죄를 위한 죽음이란 것입니다. 말씀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예수는 죽지 않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의 비밀을 아는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이와 같은 말씀의 비밀을 우리 영혼에 확실히 깨닫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여리고에 들리셨습니다. 한 맹인이 길가에서 구걸하던 중 많은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그 앞을 지나가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었던 맹인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묻기를 “이보게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까?” 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당신도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죠? 모든 병자들을 능히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낸 그 나사렛 예수와 그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이 지금 우리 동네를 지나가고 있소.”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맹인은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37-3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눅 18:37)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눅 18: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 대목을 한 번 머리 속으로 상상하며 그려 보시겠습니까? 맹인이 이 날 목소리가 얼마나 컸을까요? 우리가 만일 이 맹인이라면, 평생 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병든 자를 능히 고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미 예수가 다른 동네에서도 소경을 고치신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몰라도 바로 이 예수라면 내가 가진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평생 두 번 다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바로 이 맹인이었다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어느 정도 크기로 예수님을 부를까요? 제가 만일 이 맹인이었다면, 예수님께서 저 지평선 끝에 서 계신 것처럼 목이 터지라 큰 소리로 “예수님! 예수님!” 하고 불렀을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내 인생의 문제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으면 누가 또 맹인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여리고 성에 사는 이 맹인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큰 소리로 외치며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예수님보다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이보시오! 저분이 누군인줄 알고 이렇게 소란스럽게 떠듭니까? 조용히 좀 하십시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만류가 맹인의 마음을 오히려 더 간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아까보다 더욱 애가타는 심정으로 더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40절 본문을 읽으며 전율을 느꼈습니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무엇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까?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 이름도 모르는 맹인의 삶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게 하셨습니까? 그의 부르짖음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가 부르기 전에도 이미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부르기 전에도 이미 예수님은 그를 고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와 같은 계획은 맹인이 주님께 부르짖음으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자기에게로 데리고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맹인의 부르짖음을 나무라고 외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의 간절한 요청에 귀기울여 주시고 친히 응답해주셨습니다. 저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성경이 그와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기도하기 전과 전혀 다른 결과가 우리의 삶 속에서 펼쳐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당장 느끼지 못해도, 기도의 결과가 바로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기도에는 반드시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가 바로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하는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힘과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역사해 주십니다. 어떤 일을 놓고 고민과 염려하고 계십니까? 기도하십시오. 무슨 일이든 주님께 갖고 나오십시오.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해 간절히 부르짖던 맹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이에 지체 없이 맹인이 대답했습니다. “네, 주님, 내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평생 가슴 속 간직하고 있던 소원입니다. 아무도 이뤄줄 수 없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이라면 나의 눈을 뜨게 해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에 여리고 성에 사는 맹인은 주님께 자신있게 “네 주님 제가 보기를 원합니다!’하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물어보고 계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이 때 속으로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건 안 도와주시겠지… 기도해도 이건 해결 안되겠지…” 하는 마음을 갖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신 성품을 모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가진 그 어떤 문제도 주님 앞에서는 결코 크지 않습니다. 홍해도 주님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바다도 주님 앞에서 갈라졌습니다. 견고한 여리고 성도 우리 주님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사단도 번개와 같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주님 앞에 무덤도 열렸고, 죽은 자가 살아났으며, 우리 주님 앞에 성난 파도와 폭풍우도 잠잠해졌습니다. 우리 주님은 불가능한 일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맹인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3절을 보십시오. 맹인의 두 눈은 다시금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가 만일 큰 사고를 당해서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중 하나만 못 보게 된다고 상상해봅시다. 얼마나 안타깝고 큰 상실입니까? 이처럼 한 색깔만 못 봐도 큰 아픔입니다. 그런데 이 맹인의 경우 평생 검은색 밖에 없었습니다. 어둠이었습니다. 그의 두 눈에 밝은 빛이 비추고, 푸른 하늘, 바람에 살랑대는 나뭇잎, 하늘을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이 모든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감격에 찬 맹인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기쁨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에서도, 자신을 향해 애타게 부르짖는 한 영혼의 삶을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실로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을 향해 도움을 구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고, 반드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만을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