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8 아버지의 헤픈 사랑 (누가복음 15장 11-32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고 식사 교제까지 하는 것을 보며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잃은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를 통해서 주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음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세 번째 비유로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입니다. 우리에게 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당시 문화에 따르면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유산을 나눠주는 것은 죽기 직전이나 죽은 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아버지가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아들이 유산을 요구한 일은 아버지에게 큰 모욕이었고 수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였습니다. 그 후 몇일 후에 작은 아들은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모아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먼 곳으로 떠나기 위해서 그의 아버지가 피땀 흘려 일해 평생 일궈 놓은 논밭과 땅을 매각해 버리고 생명 같은 재산을 한 순간에 팔아버린 것이죠. 작은 아들은 먼 나레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아가며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허비하고 탕진하게 됩니다. 그는 이미 버젓이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함으로써 아버지와 가문에 수치를 주었고, 거기에 더해 아버지가 평생 힘들게 모은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낭비함으로써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들이 머물던 나라에는 큰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게 되자, 작은 아들은 생존의 문제에 시달리게 됩니다. 작은 아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돼지고기는 줘도 안 먹고, 키우지도 않습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아버지를 떠난 작은 아들이 어떻게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게 되었는지 보여줍니다. 돼지를 치던 작은 아들은 먹을 것이 부족하고 굶주리게 되자,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고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흉년으로 인해 흉흉해진 인심으로 그마져도 그에게 주려고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들에서 키우는 돼지보다도 못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인간의 실상이 이와 같습니다.
작은 아들은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던 순간, 드디어 자신이 떠나온 아버지의 집을 떠올리게 됩니다. 여태까지 집에 돌아갈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이미 아버지에게는 자식으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고, 가산을 탕진했으니 아버지와 가족들 볼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배가 고프고 굶어 죽는 신세가 되자, 그는 자신이 유일하게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하고, 품꾼들도 많지 않던가? 나는 여기서 이리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해야겠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으니 그저 하나의 일꾼으로나 삼아 주십시오.’” 이와 같이 생각한 아들은 곧 일어나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직 작은 아들이 집에 다 돌아간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는 저 멀리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고 곧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아들의 걱정과 다르게 아버지는 여전히 작은 아들을 사랑하고 그를 보기를 원해 날마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집안에서는 도련님이라 불리던 작은 아들이, 집 밖을 나가서는 거지꼴이 되어 돌아왔으니 아버지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아버지는 불쌍히 여겨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췄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작은 아들은 진심으로 자신은 더 이상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와 이 아이에게 입혀라.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 잡아라. 잔치를 벌이고 즐기자.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이 아들을 잃었다가 이제 찾았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돌아온 것에 기뻐하며 그에게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들을 주고, 돌아온 작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밭에 있다가 돌아온 큰 아들이 집에서 잔치가 벌어진 것을 보고 무슨 영문인가 종에게 물었습니다. “아우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무사히 건강하게 아우님이 돌아왔기 때문에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이 말에 큰 아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그는 집에도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집 밖에 나와서 큰 아들을 달랬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큰 아들이 말했습니다. “ 아버지, 보십시오. 저는 수 년 동안, 아버지를 섬겨 왔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저를 위해서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써 버린 아들이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께서는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큰 아들에게 자신의 동생은 가문의 수치요, 집안의 가산을 탕진한 불효자요, 죄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을 타이르며 말합니다. “아들아,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네 것이 아니냐?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이 비유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큰 아들 같이 행동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죄인들이 돌아오는 것을 작은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아버지 같이 기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만나는 것을 비난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아버지의 집을 떠나 세상에서 허랑방탕하게 살아가는 작은 아들입니까? 아니면 아버지 집에 돌아와 눈물로 회개한 작은 아들입니까? 또 아니면 저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이웃들을 정죄하는 큰 아들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크신 사랑으로 우리 모두가 주님께 돌아와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이 일을 위해서 영혼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음을 밝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온 작은 아들입니다. 아직도 우리와 같이 또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야 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있기에,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이 예수 믿고 구원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다함 없는 주님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