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는 곳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본래 이스라엘 사회에서 부정한 자들로 낙인 찍혀 있었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잘 나타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같은 죄인들도 다 품어 주시자 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그 앞에 나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수군거리며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도 결국에는 저들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자라고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 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 찾으면,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길을 잃고 헤맨 양과 같이 세상 가운데 아프고 상처 입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목자가 건강한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놔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나섰듯이, 예수님은 건강한 자들이 아니라 병든 자, 아픈 자, 상처 입은 자를 위해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양을 찾으셨을 때 목자가 크게 기뻐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하늘에서도 이 일을 기뻐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죽어가는 영혼이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부정한 자로 정죄하며 멀리했고,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잃어버린 자로 이해하시고, 그들과 식사의 자리까지 함께하시며 힘써 그들을 위로하시고 구원의 길로 초대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이 목자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우리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를 통해 우리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8절부터는 또 다른 비유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여자가 열 개의 드라크마 를 가지고 있다가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하자. 그러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찾을 때까지 자세히 뒤지지 않겠느냐? 그러다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말할 것이다. ‘나와 함께 기뻐하자.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처럼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크게 기뻐할 것이다.” ‘드라크마’는 그리스 시대에 사용하던 은화입니다. 이는 하루치 품삯에 해당했습니다. 현대식 건물은 창문이 있고, 실내에 조명이 있어서 어둡지 않고 방이 환합니다. 그러나 1세기 팔레스타인 주택은 창문이 거의 없었습니다. 촛불을 켜두었으나 대체적으로 실내와 바닥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데굴데굴 굴러간 동전을 찾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었던 것이죠. 여자는 잃어버린 드라크마 동전을 찾기 위하여 등불을 켰습니다. 그리고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어가며 열심히 찾았습니다. 드디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9절에 나타나는 이 여인의 행동을 보십시오. 동전을 찾았으면 돈을 아끼고 가족을 위해 쓸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만, 어찌된 일인지 이 여인은 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초대하여 자신이 잃어버렸던 드라크마를 찾았음을 이야기하며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여인들이 이웃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이느라 사용된 지출 비용이 어쩌면 찾은 드라크마 값보다도 더 컷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경제적인 면에서 보면 이 여인의 이런 행동이 어리석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인에게는 결코 이것이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잃어버린 동전을 되찾은 기쁨이 너무나도 크기에 그 기쁨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비유를 통해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신 주님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나타내주고 계신 것입니다. 한 번 계산기를 들고 따져보십시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습니다. 아무리 봐도 하나님께서 손해 보시는 장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하셨습니다. 왜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우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쏟으실 만큼 주님은 우리를 되찾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것이며, 한 영혼이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교제하는 예수님을 보고 삶을 낭비한다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저들의 영혼을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찾으심으로 말미암아 저들은 회개하고 천국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경제적인 원리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절대로 이익과 손해를 따져보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을 주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와 같은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우리들도 주님과 같이 잃어버린 자들을 찾기 위해 세상에 소외된 자들, 사회적 약자들, 궁핍한 자들, 허물 많은 자들을 찾아가 저들을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도록 섬기는 귀한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