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3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누가복음 13장 22-35절)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한 곳에 오래 정착하시지 않으시고, 각 성과 각 마을을 돌아다니시며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전도 여정 중에 길 위에서 어떤 한 사람이 주님께 질문했습니다. “예수님, 적은 수의 숫자만 구원을 받게 됩니까?” 성경을 보면 어떤 배경도 없이,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고 불쑥 튀어나온 질문입니다만, 두 귀가 쫑긋 서서 듣고 싶을 만큼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입니다.
구원은 할당제가 아닙니다. 신천지 이단에서 말하는 것처럼 숫자적으로 정확하게 144,000명만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 받는 사람의 숫자에 대한 질문을 받으시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구하는 자가 많아도 모두가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해 주시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힘쓰다’란 뜻은 운동선수가 시합을 할 때 최선을 다해서 달려가는 모습을 의미하며, 군인들이 전쟁을 치를 때 적군을 무찌르고 승리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 임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기를 마음으로는 바라고 있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죄악 가운데 여전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30절 말씀을 보면 “(눅 13: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지금 볼 때는 자신이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란 거짓 확신, 즉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훗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더딘 신앙의 성장을 보이는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구원의 문은 지금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이 바로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는 뜻으로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고후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구원의 문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으나,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25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눅 13: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하나님께서 천국문을 닫으시면 그 때는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놓친 자들은 그 때가서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천국문을 다시 한 번만 열어 달라고 간곡하게 애원하고 애원해도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이처럼 애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26절을 봅시다. “(눅 13: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이 사람들은 자신이 주 앞에서 먹고 마신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들이 하나님을 향한 제사를 드렸거나, 예수님께서 지정하신 성만찬에 참여한 자들로 해석해 볼 수 있겠습니다. 즉 살아 생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신앙생활하던 자들로 보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던 때에 그 자리에서 함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희한하죠? 이와 같은 열심으로 신앙생활 했는데도, 천국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 나와서 예배 드리고, 봉사, 헌금 등 갖가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받은 증거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구원하시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간 자들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주 앞에서 먹고 마셨다고 해도, 말씀을 들었어도,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지 못한 자들은 천국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문 밖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사람들이고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신앙생활은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 불상사가 일어났으니, 참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27-2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눅 13:27)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눅 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구원 받는 일은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지 못한 자들은 천국 문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이는 지옥에 던져진 자들의 고통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 동서남북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 나라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시는 중, 한 바리새인이 와서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찾고 있다고 전해주었습니다. 어쩌면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줄행랑을 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담대하셨습니다. 32절을 봅시다. “(눅 13: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 부르시며, 그가 자신의 길을 막을 수 없음을 나타내셨습니다. 32절에 사용된 ‘오늘과 내일’이란 표현은 ‘매일’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헤롯의 방해와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매일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는 사역을 계속 이어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여행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 예언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은 많은 선지자들이 죽은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선지자가 되심으로 자신 역시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암탉이 자기의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여러 차례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수 차례 구원의 손길을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무너지게 됩니다. 35절을 봅시다. “(눅 13: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도시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황폐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이스라엘에게 영적 황폐함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가운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주님을 따라 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계속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삶, 오직 예수님만 나의 주님으로 삼고 그 분께만 충성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좁은 문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들도 좁은 문을 통해 마침내 천국에 들어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