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2 영적 희년의 도래 (누가복음 13장 10-21절)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에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그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왔을 것입니다. 그 수많은 무리 가운데는 귀신 들린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무려 18년 동안 귀신 들려 고통 당하며 허리를 피지 못하고 꼬부라져 조금도 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한 번 이 여인의 인생을 상상해보십시오. 허리가 꼬부라졌으니 얼마나 일상이 고단했겠습니까? 옛날 우리 한국에서도 할아버지 할머니들 중에는 평생 논밭에서 허리 숙이고 일하시느라 꼬부랑 할아버지, 꼬부랑 할머니가 되신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잠자리에 드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부엌에 가시는 것도 얼마나 힘들어 하시는지 삶이 이만저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기록된 이 여인의 나이를 알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50대 이상 여성에게 나타나는 ‘척추뒤굽음증’으로 인한 평범한 질병 때문에 허리를 피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귀신 들려 비정상적으로 허리가 굽어졌습니다. 만일 이 여성이 젊은 30-40대였다면 어떠했을까요? 사회의 구성원으로 이웃 여자들과 물가에 가서 빨래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집에 와서는 부엌에서 요리도 하고 아이들도 교육하며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몸이 성치 못한 사람은 큰 죄를 지어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으로 여겨졌으니, 이 여인은 많은 이들에게 모욕당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을 것입니다. 또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심한 관계로 동네 사람들이 이 여인을 부정한 자로 여겨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지난 18년 동안 귀신들려 산 삶은 한 마디로 ‘생지옥’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여인이 회당에 나온 것은 예수님의 치유하심과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으나, 예수님은 귀신에게 생명을 빼앗기고 사단에게 매여 살아가는 이 불쌍한 영혼을 주목하셨습니다. 12절 말씀에 “예수께서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 가엾은 귀신들린 여자를 주목해서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꼭 필요한 사람,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되는 사람, 바로 이 귀신들린 여자가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여인을 자기가 있는 자리로 가까이 부르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 대목 자체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으려는 인생,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귀신 들린 자를 주님께서 그 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자가 가까이 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병에서 해방됐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안수’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유대인들은 육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부정하다고 여겨서 잘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몸에 닿지 않으려고 피해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 여인의 머리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사역의 특징입니다. 아무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구제불능 같은 인생을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고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13절 말씀을 이어서 봅시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안수하시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인의 꼬부라진 허리가 즉시 펴졌습니다. 주변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요? 그러나 역시 가장 놀란 사람은 지난 18년 동안 허리를 단 한 번도 펴보지 못한 당사자였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자신을 치료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만일 오는 주일 우리 교회 예배 시간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우리들도 감사함과 기쁨으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본문 속 회당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 여인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당을 관리하는 회당장은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일할 날은 엿새나 있다. 그러니 그날에 와서 병을 고치고 안식일에는 하지 마시오.”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귀신들린 여자를 고치셨다고 그를 비난하고 책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변에는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곧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이 위선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황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 끌고 나가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인이 18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예수님의 책망에 그를 반대하는 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옳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규례를 침해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을 통해 그의 백성에게 참된 쉼을 주시고자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던 자들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고 온 무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과 같으며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하나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밭에 가지고 가서 뿌린 겨자씨와 같다. 그 씨가 자라고 나무가 되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둥지를 틀었다. 하나님 나라를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하나님 나라는 마치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이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세 말에 섞으니 전체가 부풀게 되었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매우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가장 좋은 예입니다. 아무도 찾아보지 않았던 귀신들린 한 여자를 예수님께서 치유하심으로 회당에 모인 온 백성이 찬송하는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늘 이처럼 하나님나라는 작고 연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의 능력은 온 세상을 바꿀 만큼 강력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겉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겨자씨를 땅에 심는 것과 같고, 밀가루에 누룩을 넣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작은 것 같지만 모든 것을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한 여성의 삶에 깊은 관심을 보이시고 그녀를 자기 가까이로 부르시고, 그녀를 치유하시고 그의 삶을 회복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차례입니다.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게 이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함으로써 복음의 겨자씨를 심고, 복음의 누룩을 세상에 뿌림으로 하나님나라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