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1 회개의 기회 (누가복음 13장 1-9절)


불교 용어 중에 ‘업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평상시 선행을 많이 쌓아 놓은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게 되고, 반대로 평상시 악행을 많이 쌓아 놓은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무시무시한 벌을 받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은 자기 업보를 치른 것이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을 벌을 받는 단순한 세상이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욥과 같이 의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 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고난을 당하거나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저 사람의 지난 날 악행에 대한 업보다’라고 평가하거나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열왕기하에 등장하는 의로운 왕 요아스가 젊은 날 죽은 것과 같이, 의로운 사람 욥이나 다니엘에게도 고난이 찾아온 것과 같이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의인들의 고통과 죽음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이가 삶 속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고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은 분명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저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일거야”하고 세상을 흑백논리로 해석했습니다. 이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욥의 친구들입니다. 그들은 욥이 고난을 당하자, 그가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으로 봐서 그가 분명 엄청난 죄를 지었을 것으로 보고 그를 정죄했습니다. 욥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십니다.
오늘 본문도 그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식민지 백성에게 매우 폭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갈릴리에서 올라온 어떤 사람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아마도 로마로부터 유대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하다가 잡혀 반역죄로 살육을 당한 사람들이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겠습니다. 1절에 보니 빌라도가 저 죽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죽은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문맥에 따라서는 성전에서 죽임을 당한 것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총독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을 그들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하던 유대인들의 통념을 깨트리셨습니다. 즉 이 당시 유대인들은 이 갈릴리 사람들이 하나님 보실 때 어떤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렇게 비참하게 죽은 것이라 여기며, 죽은 갈릴리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갈릴리 사람들이 죽은 것은 결코 다른 이들보다 더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다른 이들은 정죄하면서 자신의 죄는 돌아보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책망하시며,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와 같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에 의해 죽은 희생자들을 비난하며 자신들은 의롭기 때문에 이런 비극이 자신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았고, 갈릴리 사람들은 악하기 때문에 벌을 받아 죽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보고 내린 결론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생각을 책망하시며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와 같은 비극적인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4절에는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진 사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로암은 예루살렘 성벽의 남동쪽에 위치한 저수지 이름입니다. 실로암 근처의 예루살렘 성벽에 감시 초소인 망대가 있었는데 그 망대가 건설 중에 무너져서 열여덟이 죽는 대형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유대인들은 죽은 18 명의 희생자들이 분명 죄가 많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다시 자신들은 죽은 이들보다 더 의로운 삶을 살아서 벌을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4-5절을 읽겠습니다.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은 누구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심판 때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6절부터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 주어진 시간 동안 반드시 회개의 열매를 맺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한 땅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는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을 것을 기대했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는 과수원지기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3년 동안 이 나무가 열매를 맺도록 기다리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 열매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다. 그러니 어서 이 나무를 찍어 버리자. 땅이 아깝다.” 그러자 과수원지기가 땅 주인에게 대답합니다. “주인님 우리 올해만 한 번 더 지켜봅시다. 제가 나무 둘레 땅을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혹 내년 즈음에는 열매가 열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 때 가서 찍어 버리십시오.”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회개의 열매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긍휼이 많으신 주님은 지금 심판을 지연시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참지는 않으십니다. 때가 되면 나무를 찍어 버리는 날이 오듯이, 죄를 심판하시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경고였습니다. 다른 이들이 고통 당하고 망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의롭게 사니까 저런 고통을 안 당하지?” 이런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겸손한 태도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를 회개하여, 회개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께 심판과 벌을 받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즉 아직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합니다만, 심판은 무한정 지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오시는 그 날 심판은 시작됩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