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30 굳은 결심 (누가복음 9장 51-62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고 드디어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는 성경의 이 대목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예수님의 본인의 자발적인 선택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주님은 실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이 속한 남쪽 유대 지역으로 내려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지역감정이 격해서 서로 상종을 안 할 정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목적지가 유대지역임을 알게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문전박대 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못 오게 막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모이면 모였지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제자들 중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기분이 무척 상했습니다. 이에 이들은 예수님을 보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우리가 하늘에서 불이 내리도록 명령하여 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까요?” 아마도 야고보와 요한은 이전에 구약시대 때 엘리야 선지자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아하시야 왕이 보낸 군대를 불태워 죽인 장면을 생각하며,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도 충분히 그런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에게 적대감을 보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기분이 상하여 저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불에 타 죽는 심판에 이르게 하고자 한 것이죠.
55절을 보면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이들을 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이십니다. 바로 사마리아 사람들과 같이 세상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무시 받는 사람들을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도 모르고 저들을 심판하여 죽이자고 말했으니,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꾸중을 듣게 된 것이죠.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요한은 이처럼 불로 심판하여 사람을 다 죽이자고 말할만큼 다혈질이고 예수를 따르는 자라는 엘리트주의에 권위의식에 빠진 사람이었으나, 훗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그의 별명이 사랑의 사도 요한으로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쓴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읽어보면 형제사랑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그의 삶이 변화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냉대하고 모욕을 주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들은 원수까지도 끝까지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여우와 새들도 정해진 장소에서 쉼을 가졌으나, 예수님은 순회하는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정해진 보금자리가 따로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그네와 같이 가난하고 자기 집 없이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이에게 예수님은 그가 따라오겠다는 제자의 길이 안정적인 삶이 아니라, 고난의 삶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한 사람을 보고 나를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주님, 제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자식이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고 부모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60절에서 깜짝 놀랄 답변을 주셨습니다. “(눅 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지금 예수님께서 부모의 장례식은 참석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십계명에 기록될 정도로 하나님께도 중요한 가치입니다. 따라서 자식이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덕목보다도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나라에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번에는 또 다시 어떤 이가 예수님을 향해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그의 후임 선지자인 엘리사를 불렀을 때 엘리사도 오늘 본문과 동일한 요구를 했습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드린 뒤에,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그를 말리지 않고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 “제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하고 이야기한 사람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일화를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으로서의 도리고, 부모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니 예수님께서 당연히 흔쾌히 허락해 주실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치 인간의 기본적인 덕목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 참여, 먼 여정을 떠나기 전 자녀가 부모에게 인사하는 것은 우리가 볼 때 당연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의 문화에서 타당해 보이고 칭찬받을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나라를 위한 삶과 충돌될 때가 있음을 보이시며, 굳은 결심을 가지고 세상 그 어떤 가치보다 주님을 위한 삶을 가장 우선시하며 살아가는 자야말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길은 고난이 따르고 자기를 날마다 부인해야 하는 쉽지 않은 길, 험난한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이 길을 따라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세상과 하나님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선택의 여지없이 하나님나라를 택하십시오. 그 선택이 우리에게 고난을 동반한다 할지라도, 굳은 결심으로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지금 당장은 그 길이 죽는 길 같아도, 그 길이야 말로 사실 사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되어 풍성한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