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07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누가복음 3장 1~14절)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봅시다. 카메라는 이 당시 최고 권력자인 로마 제국의 황제인 디베료를 비춰줍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 밑에서 유대 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그리고 그 밑에서 팔레스틴 각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헤롯 가문의 분봉왕들의 이름을 나열합니다. 당시 이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주름잡고 있는 주체로 보였습니다. 2절에는 로마에 잘 보이기 위해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산 안나스와 가야바가 등장합니다. 이들 역시 유대 민족을 다스리는 높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이들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이와 같은 세상 권력자들에게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 임하셨습니까? 2절을 봅시다. 빈 들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화려한 왕궁이나 궁궐에 임한 것이 아니라,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빈 들’에서 살고 있는 무명의 청년 세례 요한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권력자들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역사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게 주님께 자신의 삶을 드리기를 원하는 자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세상의 부귀영화가 몰린 곳에 하나님은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주님은 겸손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비록 우리의 인생이 ‘빈 들’과 같은 허허벌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장소로 변화하게 됩니다. 분주하고 요란한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독대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빈 들’과 같은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십시오. 그곳에서 주님의 말씀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거대한 궁정에서 사는 로마 황제도, 큰 힘을 자랑하는 총독도, 왕들도 누리지 못한 풍성한 은혜가 빈 들에서 살고 있는 세례 요한에게 임하였습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겉모습을 보고 판단합니다. 그의 소유의 많고 적음을 놓고 그의 인생의 가치를 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십니다. 황제와 총독과 왕들은 화려하고 옷을 입고, 부유한 삶을 즐기며 살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습니다. 옷도 오래되고 잠자리도 편치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려는 그의 마음, 요한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사용하시도록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릴 때,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와 풍성한 능력으로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과 함께 하자, 사람들도 세례 요한 안에 있는 특별함을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전국 각지에서 빈 들에 있는 요한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게 됩니다. 요한은 요단 강 부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뉘위치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겠다는 고백으로 그에게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중에는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를 결단하고 소망하는 마음으로 세례 요한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오늘날로 말하면 유행을 타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인증을 하기 위해서 거짓 회개하는 마음으로 요단 강을 찾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낌새를 직감한 세례 요한은 자신을 찾아온 무리들에게 세례 받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합니다. 7-8절입니다. “(눅 3: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요한은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짓으로 자신 앞에 나온 자들을 책망했습니다. 요한은 이들을 “독사의 자식들아!”하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매우 자랑스러워했고, 그러한 사실 때문에 자신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죄를 회개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독사의 자손’임을 밝히 가르쳐주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죄를 짓고 독을 뿜는 뱀처럼 살아가는 자들은 더 이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독사의 자식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교회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닌 것과 동일합니다. 겉으로는 교회 다니며 신앙생활 하고는 있지만, 그 실상은 세상의 순간적인 쾌락과 죄악을 즐기고,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진노의 자식인 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도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9절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마다 도끼에 찍혀 불에 던져진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주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머리 속에서만 머물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 열매 맺는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을 찾아온 무리 중에는 군인들도 있었고, 세리들도 있었습니다. 요한의 경고에 이들은 두려워하며 어떻게 해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물어보았습니다. 이에 요한은 먼저 세리들에게 정해진 세금 외에 더 거두려는 부정을 멈추라고 했습니다. 군인들에게는 시민들의 소유를 힘으로 뺏거나 강탈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는 어찌 보면 직업윤리상 너무나도 당연히 지켜줘야만 하는 일들이었습니다만, 이 당시에 세리들과 군인들은 대부분 부정직한 세금징수, 권력 남용 등 부정부패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맡은 바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하면 왠지 모르게 기도원 들어가서 40일 금식기도 하고, 눈물 콧물 펑펑 쏟으며 우는 장면을 떠올리지 않습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하면, 교회 나와서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말씀 보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일상의 변화를 주문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정직하고 성실하게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을 유심히 보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의 인생이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빈 들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기를 힘쓰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감으로써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올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며 우리가 변화시켜야 할 삶의 방식은 없습니까? 끊어내야 할 반복되는 죄악은 없습니까? 게으름, 나태, 음란, 교만, 미움, 시기, 질투, 분노, 도둑질 등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삶의 방식을 단절하고 떠나는 것이야말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새로 시작한 2021년도, 우리 삶에 남아 있는 죄악을 모두 끊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서기를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그 경건한 삶 속에서 우리에게 찾아오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평강이 우리 삶에 가득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