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6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단어로 말해야 한다면 무엇을 뽑으시겠습니까? ‘돈’입니까? ‘권력’입니까? ‘명예’입니까? 아마 지금 당장은 우리 각자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서 중요한 것이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빵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산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역시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을 대표합니다. 이 중 첫 번째 네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머지 여섯 개의 계명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줄이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입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를 줄이고, 줄이고, 또 줄여서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남게 됩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 불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와 같이 성경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원리를 가르치는 성경을 기반으로 세워진 곳이 교회 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장 많이 이야기하고, 사랑에 대해서 가장 많이 노래하는 곳이 바로 교회 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동시에 사랑이 가장 많이 필요한 곳 또한 교회 입니다. 고린도 교회도 사랑이 많이 필요한 교회 였습니다. 교회를 생각만 해도 서로의 만남이 기대되어 얼굴에 미소가 빙그레 떠오르고, 만나면 서로 웃음과 기쁨이 넘치는 사랑과 포근함이 넘치는 교회… 그런 교회 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모이기만 하면, 서로 내가 잘났네, 내가 옳다네 치고 박고 싸우고 분열하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겉에서 볼 때에는 숫자적으로는 부흥하고, 교회 재정도 넉넉하고, 방언과 은사의 예언을 받은 사람들도 많은 건강한 교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그 안을 들여다보면, 성도들이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고성과 언쟁이 오가는 사랑 없는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겉으로 근사해 보여도 사랑을 잃어버리면, 앙꼬 없는 찐빵처럼 아무 쓸 데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가르쳤습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본래 방언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성도들과 특별한 의사소통을 하도록 돕는 은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언하는 자들을 통해 교회에 덕을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을 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특별하게 생각한 나머지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자들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방언을 하늘의 언어요 천사의 언어로 생각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예배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무질서하게 방언을 하여 예배를 혼란 시켰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방언을 하는 자들은 이 은사를 통해 성도들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 자신을 높이고 사람들을 낮추고 무시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가리켜 그들이 아무리 방언을 하고 천사와 같은 말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1절에 ‘구리’라는 말은 ‘징’과 같은 악기 입니다. 고린도 도시에서는 그리스의 신들을 섬기기 위한 종교의식을 행하며 매우 소란스럽게 징과 꽹과리 같은 악기들을 사용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무당들이 굿판을 벌일 때, 정신없이 사물놀이를 연주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문화에 익숙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사랑 없이 방언만 하는 것은 이방 종교에서 울리는 징과 꽹과리 소리와 다름이 없다고 했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미국에는 유명한 방송 설교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을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잘하는지 한 번 보면 빠져 듭니다. 그중 한 유명한 설교자가 얼마나 설교를 잘하는지요, 마음에 근심이 많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불면증 환자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마음에 평안을 얻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몇 해 후 그 설교자는 싸늘한 주검으로 그의 집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을 알고 보니 그가 습관적으로 수면제를 과다 복용한 것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염려와 고민을 말로 위로하고 편안하게 잠들게 하던 설교자였지만, 정작 자신은 걱정과 염려로 잠을 이루지 못하여 매일 밤 수면제를 복용했던 것이지요. 아무리 설교자가 말을 잘 해도, 그 안에 사랑이 없는 요란한 징과 꽹과리와 같을 뿐입니다.
우리는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위로가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힘든 사람들을 말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상대편이 우리가 전해주는 말을 듣고 위로를 받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전해주는 복음을 듣고 상대편이 회심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정작 그 위로의 말을 전한 우리 자신의 삶은 메말라 가게 됩니다. 비록 그의 말이 따뜻하고 부드러워도 사랑이 없는 사람은 정작 자신의 영혼은 차갑게 식어갑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삶을 경계하였습니다.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2절을 보니,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과 성경에 대한 놀라울 만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리 비상한 성경 지식을 가진다 한들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성경에 대하여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자들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지식을 통하여 동족인 유대인들을 섬기려 하기 보다는, 도리어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 받기를 원했고, 유대사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원했습니다.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소유 했어도, 그 마음에 사랑이 없었기에 그들은 예수님 보실 때도 아무런 유익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2절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란 표현도 나옵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 누군가의 병이 낫고,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것은 분명 믿음의 역사 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무리 그러한 놀라운 믿음을 가졌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쉽게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됩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재주가 많습니다. 할 줄 아는 것도 많고, 잘 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것 저것 맡아서 합니다. 재주를 가지고 열심히 섬기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갑니다.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앞에 사람에 비해서 재주는 많이 부족합니다.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고, 서툴고 느립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사랑이 많습니다. 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위로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서툴지만 그의 곁에 있으면 미소가 떠오르고 마음이 따뜻해 집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택하시겠습니까? “재주는 많은데 사랑이 없는 사람” 아니면 “재주는 별로 없지만 마음에 사랑이 많은 사람” 어떤 사람이 더 좋으십니까?
우리 안에 사랑이 없어도 여전히 산을 옮기는 듯한 큰 일들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산은 옮길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그 곁에 있던 사람들이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일은 잘 하는데, 사람은 안 남아요. 이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 주변에 보면 구제 활동이나 봉사활동을 잘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남을 잘 돕고 섬기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귀하고 꼭 필요한 은사 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섬기는 것이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 자기 행복을 위한 선행과 희생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부자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헌금과 희생을 통해서 교회 내에서 자신이 중요한 사람임을 알리길 원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자신의 돈을 들여가며 가난한 자들을 도운 이유는, 정말 그들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송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구제요 봉사지만 알고 보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명예와 권세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구제 활동, 봉사 활동 역시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또한 우리 몸을 불 속에 던지는 듯한 엄청난 봉사와 희생을 치룬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동기가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선행도,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헌신도, 사랑이 없으면 그러한 선행과 헌신은 우리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