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1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고린도전서 9장 1-14절)

(고전 9: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고전 9: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고전 9:3)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고전 9:4)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고전 9: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고전 9: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고전 9: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고전 9: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고전 9: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고전 9:10)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고전 9: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고전 9: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고전 9: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전 9: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율법의 모든 요구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먹지 못할 음식이 없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다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 같은 자유를 행함에 있어서 형제 사랑의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비록 내가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자유가 있으나, 만일 그 일을 행함으로 인하여 형제가 시험에 들거나, 믿음에서 떨어지는 일이 있다면 자유를 행하는 것보다 겸손하게 절제하는 것이 공동체적으로 덕을 세우는 일이며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전파를 위하여 절제하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써 사도로써 가진 권한은 무엇이 있는지 언급하고, 자신이 그것들을 어떻게 절제해 왔는지 하나씩 열거해 줍니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자기자랑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이 필요하다면 그리스도인이 가진 자유와 권한을 절제하여 복음 전파가 방해 받지 않도록 살아가도록 본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1절을 봅시다. “(고전 9: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첫째로, 바울은 자신이 ‘자유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자’란 ‘노예가 아니라 자유시민이다’이런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구속에서부터 해방된 자’란 뜻 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임 받은 사람 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을 비난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은 이 사건을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만, 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이야말로 그가 사도가 될 자격을 얻게 된 사건 입니다. 넷째로, 바울은 부패하고 타락한 도시 고린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이와 같이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자유자요’, ‘사도요’, ‘예수님을 본 자요’, ‘교회를 세운 자’임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이와 같은 위치에 있는 자로서 자신이 가진 권한이 무엇이 있는지 열거합니다. 4절을 봅시다. “(고전 9:4)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여기서 말하는 ‘먹고 마시는 권’이란 ‘아무것이나 제한 없이 원하는 것을 먹고 마시는 자유로운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는 것은 복음 전파하는 사도들이 가진 권한, 즉 ‘교회 공동체로부터 먹고 마실 음식을 공급받을 권한’을 의미합니다. 분명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전파 하는 일에 전념했고, 교회는 사도들이 온전히 이 일을 감당하도록 지원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도 사도로서 이와 같은 권한을 가진 자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회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헌금을 통해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그는 자급자족적인 선교 사역을 했습니다. 즉 자신이 직접 텐트를 만드는 일을 통하여 생활비와 사역비를 마련했던 것이죠.
5절을 봅시다. “(고전 9: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결혼하여 그들의 아내들과 함께 전도 여행을 다녔다는 점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사제나 수녀들의 결혼을 강제적으로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적 뒷받침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도 결혼하여 그들의 아내들과 함께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했던 것이죠. 5절에 나오는 ‘주의 형제들’이란, 문자 ‘그대로 예수님의 형제들’을 의미합니다.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예수님의 친동생들 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이들 역시 결혼하여 아내들과 함께 복음 전파를 감당했습니다. 이와 같이 결혼한 사도들과 그의 가족들은 교회의 후원을 통해서 부양 받으며, 사역에 전념 했습니다. 비록 바울 자신은 결혼하지 않았으나, 사도 바울은 자신도 사도로서 이와 같이 결혼하여 가족을 이루고, 교회로부터 가족의 부양을 후원 받을 권한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6절을 봅시다. “(고전 9: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사역할 때 텐트를 만드는 일을 하며 생활비와 사역에 필요한 비용을 스스로 충당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면서도, 생계를 스스로 감당했던 것이죠. 그는 고린도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자신이 가진 권한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여기서 바나바를 언급했을까요? 성경학자들은 바나바도 바울과 같이 사도적 권위를 인정 받는 자였으나, 교회로부터 부양 받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스스로 일을 통해 생활비를 책임지며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나바는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헌납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교회로부터 아무런 경제적 대가 없이 복음 사역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바나바 역시 사도로서 복음전파에 전념하기 위하여 교회로부터 부양 받을 권한이 있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7절을 봅시다. “(고전 9: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바울은 세상의 예를 통해 복음전파를 하는 자들이 교회로부터 부양 받을 권한이 있음을 논리적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세상에 병사로 부름 받은 사람 중에 자기 돈으로 군복 사고, 군량미 구하고, 무기 구입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군인들은 모두 나라에서 주는 돈으로 살아갑니다. 또한 포도나무를 심고 가꾸는 자는 공짜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의 열매를 먹습니다. 또한 양떼를 기르는 목자는 공짜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양떼의 젖을 먹고, 양떼의 털을 깎아 돈을 법니다. 바울은 이러한 예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일꾼들 역시 복음으로 말미암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8-9절 입니다. “(고전 9: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고전 9: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이전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곡식을 떨 때 방아를 돌렸습니다. 그 방아를 돌리는 데 사용한 가축이 소 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소로 하여금 곡식을 떨게 할 때, 그 입에 망을 씌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경고 했습니다. 소들도 일하며 굶주리면, 자신들이 일한 현장에서 땅에 떨어진 곡식을 자유롭게 먹게 하라는 것 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의도가 단순히 소에 대한 이야기를 뛰어넘어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10-11절 입니다. “(고전 9:10)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고전 9: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무더운 여름에 밭을 가는 자는 가을에 수확할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을이 오면 자신이 뿌린 씨앗이 열매 맺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배부르게 먹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를 위하여 일한 것을 떠올리게 하며, 만일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생계를 도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이와 같이 교회로부터 부양 받을 권리, 세상 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기도와 말씀 교육, 복음 전파에만 몰두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혹 자신이 가진 이 권한을 사용함으로 인해 복음전파에 방해가 될까 하여 이 권한을 쓰지 않았다고 고백 했습니다. 12절 입니다. “(고전 9: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바울은 분명 자신이 가진 권한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에게 자신의 생계를 맡기지 않고, 오히려 손수 땀 흘려 일하며 자신의 생활비를 공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 아무도 시험 드는 일이 없도록 했고, 자신의 권한을 절제함으로 교회 안에 덕을 세웠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자신의 권한과 자유를 행사하지 않는 것에 모범을 보임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절제하며 사는 것이 교회 공동체와 복음전파에 얼마나 큰 유익이 될 수 있는가를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특권을 어떻게 해서든지 휘두르려는 경향이 큽니다. 사람들은 VIP 대접 받기를 좋아하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지위와 더 좋은 형편을 누리며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가진 권리와 자유를 오히려 절제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사도로서 가진 특권도, 그리스도인으로 가진 자유도 복음 전파가 방해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절제하며 살았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부름 받은 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가진 특권만 주장하기 보다는, 교회 공동체와 복음전파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권리를 겸손하게 내려놓아 하나님 나라 확장하는 일에 걸림돌이 아니라 귀중한 디딤돌로 사용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