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21 부양의 의무를 다한 룻과 나눔의 의무를 다한 보아스 (룻기 2장 1-23절)

베들레헴에 찾아온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피신했던 나오미는 그녀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을 모두 죽음으로 잃어버린 채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다시 온 나오미는 말 그대로 빈털터리 신세였습니다.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할 정도로 힘든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얼마나 쫄딱 망했는지 베들레헴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이 사람이 정말 우리가 아는 나오미가 맞는가?”하고 떠들썩 했을 정도였습니다. 나오미 스스로도 자신의 이름을 ‘고통’, ‘쓰다’라는 의미를 가진 ‘마라’라고 부를 정도로 그녀의 인생은 힘들고 고달픈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까지 모두 하늘로 떠나 보낸 후,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함께 찾아왔으니 나오미가 느낀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그런 나오미 곁에는 그녀의 자부, 며느리인 룻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이토록 힘든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룻은 그녀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룻의 입장에서 보면 삶이 어려워진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언어도 문화도 낯선 베들레헴으로 가서 사는 것보다, 자신이 자라온 모압 땅에 머무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고 편안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나오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룻은 진심으로 나오미를 사랑했고 시어머니의 안위를 걱정해 주었습니다. 룻은 자신의 남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어머니를 옆에서 끝까지 돌보고 봉양하는 의무를 지켰습니다. 룻은 참으로 멋진 사람 입니다.

1.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현실의 벽은 높았습니다. 먹을 것은 점점 떨어져 갔고, 두 사람은 식량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 했습니다. 이 때 룻은 나오미에게 자신이 밭에 나가서 떨어진 이삭이라도 주워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난한 자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추수 때에 다 거두어 가지 않고 일부로 곡식단을 조금 남겨두었습니다. 이는 약자들을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규정해 놓으신 이스라엘 공동체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 입니다. 따라서 당장 생계가 곤란한 상황 가운데 룻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고, 그의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밭에 나가 이삭을 주워 오려고 했던 것입니다. 룻은 모압 사람 입니다. 이방 여인 입니다. 가난하고 초라한 과부 입니다.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고 천대 당하기 쉬운 사회적 약자 입니다. 게다가 이방 여인으로 하여금 떨어진 이삭을 줍게 허락할만한 특별한 호의를 입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자신의 시어머니를 공양하려는 마음으로 떨어진 이삭을 주으러 갔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룻과 나오미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룻이 그의 시모를 공양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으로 노력했는지, 많은 희생을 감당하려 했는지 보게 됩니다.
룻은 비록 가난하고, 힘없는 초라한 과부였으나 마음만큼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이방 사람이었으나,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로 왔으며 자신이 믿던 이방 신을 버리고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섬기던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기로 결심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룻을 굽어 살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에 들어가 이삭을 줍도록 하셨습니다. 사실 이 당시 밭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사방이 밭이고, 밭의 주인이 적어도 수 백명이 넘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밭 가운데 룻이 나오미의 죽은 남편인 엘리멜렉의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의 밭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는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우연이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주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펼쳐집니다. 하늘을 나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도 주님의 허락하심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것이죠.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 됩니다. 우리가 이 시간 살아 숨쉬는 것도 주님의 뜻이요, 만일 우리가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주님의 뜻 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져 갈 뿐 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붙잡고 인도해가고 계신다는 이 진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도 큰 은혜 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여전히 주님의 실패하지 않고 변함없는 섭리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인도해가고 계시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선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고난은 찾아옵니다. 아픔과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우리 믿음을 연단해 가십니다. 고난 가운데 우리의 교만을 꺾으시고 겸손케 하시며,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따라서 고난 가운데서도 여전히 주님의 손이 우리의 삶을 붙잡고 계심을 신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로 세상이 흔들리고, 삶에 어려움이 찾아와도 여전히 선하신 우리 주님이 우리 삶을 인도해 가고 계심을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내일이 잘 보이지 않아도, 지금 당장은 모든 것이 절망적인 것처럼 보여도 반드시 주님의 선한 뜻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룻의 입장을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생과부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와 조국을 떠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이스라엘로 이민 왔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집 렌트비 낼 돈도 없고, 마트에 가서 장 볼 돈도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애처롭고 괴로운 상황 입니까? 누가 이런 룻을 보고 ‘복되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미국 하나만 봐도요 ‘Ruth’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전국에 백만명이 넘습니다. ‘Ruth’ 이란 이름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자 이름 상위 50위 안에 항상 들어갑니다. 왜 부모들이 그들의 딸 이름을 ‘Ruth’이라고 짓는 것일까요? 이 여인은 젊은 날 남편이 세상을 떠나 과부가 된 불쌍한 여인 아닙니까? 당장 먹을 것을 사먹을 돈이 없어 남의 밭에 가서 떨어진 이삭을 주어야 했던 가난한 여인이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미국만 해도 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룻’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이 여인의 삶에 역사하셨던 ‘신실하신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룻의 삶에 큰 자비를 부어 주셨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을 희생하여 공양하려는 그녀의 성실함에 여호와 하나님은 넘치는 은혜로 갚아 주셨습니다.
지금도 그녀의 이름은 온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 입니다. 실제로 룻기는 실패, 흉년,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그러나 룻기의 마지막은 기쁨과 번성 그리고 소망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 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혹시 지금 이 설교를 듣고 계신 분들 가운데 ‘내 인생이 룻과 같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픔에 처해 있으십니까? 경제적 어려움에 내일을 맞이하기 두려우십니까? 코로나19로 인생의 흉년을 맞고 계십니까? 우리들이 바로 또 하나의 ‘룻’ 임을 기억하십시오. 룻의 삶에 신실하게 역사하시고 도와주셨던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도우시는 동일하신 하나님 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의 삶을 포기하거나 외면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고난 가운데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뜻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힘들어도 우리 삶을 붙들고 계신 선하신 주님이 계심을 신뢰하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고, 눈물이 변하여 즐거움의 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61장 3절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 했습니다. “또 주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슬퍼하는 시온의 백성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씌워 주고,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며, 근심 대신 찬양의 옷을 입혀주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시온의 백성들로 하여금 주께서 심으신 ‘의의 나무’와 같게 하여서, 그들이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들’이라 불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우리말성경)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룻의 삶 가운데 함께하신 주님의 선하신 섭리가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 삶 가운데 주의 완전하신 계획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2. 성실하게 공양의 의무를 다한 룻
이와 같이 룻은 삶의 위기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나오미를 공양하기 위하여 우직한 소처럼 떨어진 이삭을 줍기 위해 천천히 한 걸음씩 앞으로 전진해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의 밭에 가서 떨어진 이삭을 줍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때마침 이 자리를 지나던 보아스는 자신의 밭에서 일하고 있는 낯선 젊은 여인 룻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일꾼들에게 그녀에 대해서 물어보았고, 사람들은 그녀가 모압 지방에서 온 모압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성실하게 아침부터 지금까지 일해 왔는지 칭찬했습니다. 5-7절 말씀을 한 번 봅시다. “(룻 2: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뉘 소녀냐 (룻 2: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룻 2: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이미 베들레헴 성내에는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와 그녀의 며느리 룻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진 것으로 보입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시어머니에 대한 룻의 효성과 그녀의 정숙한 행실 그리고 성실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를 내심 칭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이방 사람을 무시하고 천대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여인 룻을 칭찬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멋진 장면 입니까? 룻이 얼마나 성실하고 부지런한 여인이었는지 보아스의 일꾼들도 그녀를 칭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7절을 보니 그녀는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쉰 것 말고는 계속해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고 불성실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하기를 싫어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도 대충대충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성실하게 삶을 살아가며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하나님이 채워주시거나 도와 주시리라고 믿는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기만’입니다. 성경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은 자신의 삶 속에서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간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강력하게 권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서 목수로 살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그 자세와 태도를 유심히 보십니다. 내 직장 동료나 상사 혹 가게 주인만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열심히 성실하게 부지런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와 같이 성실하게 일하고 계시기 때문 입니다. 주님은 주의 백성들이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성스럽게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을 들어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들로 사용하시고, 또한 성실한 자들의 삶에 크신 은총을 부어 주십니다. 시험공부는 대충하고, 시험에서 백 점 맞기를 기도하는 학생은 하나님 보실 때 불성실한 사람 입니다. 회사 일 대충하고 성공하기를 바라는 비즈니스맨은 하나님 보실 때 게으른 사람 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동일하게 적용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일을 눈 여겨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곳에서 성실하게 일하십시오. 그리하는 것이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며, 하나님도 그와 같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크신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3. 나눔의 의무를 다한 보아스
보아스는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공양하기 위해서 열심히 떨어진 이삭을 줍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룻에게 큰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8-9절 말씀 입니다. “(룻 2: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룻 2:9)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먼저 보아스는 룻이 앞으로 다른 밭을 찾아나갈 필요가 없도록 자신의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도록 공식적으로 허락해 주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남자 일꾼들에게 룻에게 못되게 굴거나 건들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 두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룻이 이삭을 줍다가 목이 마르면 자신의 일꾼들이 항아리에 길어다 놓은 물을 언제든지 따라 마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룻은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이방 여인인 자신이 어느 집의 밭에 가서 떨어진 이삭을 주울 수 있을지, 괜히 해코지 당하진 않을지 염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아스의 밭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언제라도 쫓겨날지 몰라 마음 속 불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보아스가 이와 같은 호의를 베풀어 준 것은 룻에게 너무나도 큰 은혜였습니다. 룻은 땅에 엎드려 보아스에게 절하며 이방 여인인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것에 대해서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자신이 룻에게 왜 이러한 친절과 호의를 베풀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11 말씀 입니다. “(룻 2: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보아스는 나오미가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을 잃은 후 큰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나오미를 공양하기 위해 룻이 그의 부모와 고국을 떠나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에 함께 왔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보아스는 이와 같이 자신의 시어머니에게 선의를 베푼 룻에게 자신도 나눔의 선의를 베푸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한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룻이 행한 선한 일에 보답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축복했으며, 이방신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선택하여 온 룻에게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기를 원한다고 축복 했습니다.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입니다. 그에 비해 룻은 가난하고 힘 없는 이방 여인 입니다. 보아스가 룻을 모른 척해도 아무도 보아스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최선을 다해 오늘 처음 본 이 이방 여인 룻에게 나눔과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심지어 보아스는 룻이 배고프지 않도록 그녀에게 먹을 것까지 제공해 주었습니다. 14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룻 2: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보아스는 식사 때가 되자 룻을 불러 그녀에게도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먹을 것을 얼마나 많이 주었던지 14절에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실한 룻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밥을 먹자마자 곧바로 다시 떨어진 이삭을 줍기 위해 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에 보아스는 자신의 일꾼들에게 그녀가 곡식 단에서 이삭을 모으더라도 창피를 주지 말며, 오히려 그녀가 많은 양의 곡식을 주어 갈수 있도록 곡식 단에서 얼마를 남겨두라고까지 말해 두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보아스가 룻을 돕기 위해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챙겨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진실로 보아스는 가난한 이웃을 돕고 나누는 삶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죠.
오늘날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하나의 정신이 있다면, 바로 ‘나눔의 정신’ 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 ‘나눔’은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오신 귀한 삶의 양식 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처럼 사회적 약자, 가난한 이웃들에게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그들을 도와주기를 명령하셨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이 가진 것을 룻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던 가난한 자를 돕고 섬기는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물론 보아스는 유력한 자, 부자였습니다.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나눌 수 있는 것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잠시 주위를 돌아보면, 분명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삶은 부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넉넉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이 이웃들과 나누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도 보아스처럼 우리 주변에 가난하고 고통에 처한 이웃들을 보살피고 나누며 위로할 수 있는 멋지고 복된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결론. 성실히 공양의 의무를 다한 룻과 나눔의 정신을 실천한 보아스
사실 룻기에는 출애굽기와 같이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평범해 보이는 일상 가운데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룻은 그의 시모 나오미를 버리지 않고, 그녀를 공양하기 위해 성실하게 떨어진 이삭을 주었습니다. 보아스는 이런 나오미와 룻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로 나눔의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이 멋지고 아름다운 보아스와 룻의 삶에 개입하셔서 더 풍성한 은혜의 역사를 펼쳐 가십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도 어떤 놀라운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기사가 일어나진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세심하게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님의 뜻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우리 삶을 붙들고 계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시오. 주님의 계획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살아가며, 가난하고 힘든 이웃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멋지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