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고전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고전 6: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 6: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고전 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고전 6: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고전 6: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고전 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비극 중 하나는 교회 안이 분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나 서로 반목하여 다투고 싸우는 것만큼 교회 전체를 큰 고통과 아픔으로 빠트리는 일도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성도들이 서로 고발하여 법정에 서는 가슴 아픈 일들이 있습니다. 교회 성도가 목회자를 고발하기도 하고, 반대로 목회자가 성도를 고발하기도 하고, 같은 목회자끼리 혹은 같은 성도끼리 고발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수록 세상에서 교회는 손가락질 당하고 욕을 먹어, 결국에는 교회를 통해 나타나야 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게 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바로 이와 같은 분쟁과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성도들은 파벌을 형성하여 서로 다투었고, 급기야 서로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교회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세상 법정까지 가서 소송하는 일을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1절 말씀을 봅시다. “(고전 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1절에 ‘구태여’라는 단어가 있지요? 이는 ‘너희가 소송할 때 감히 어떻게 성도들 앞에서 고소하지 않고, 불의한 사람들 앞에서 고소하였느냐?’ 식의 강한 어조가 담긴 책망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인 교회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불신자 세상 법정에 서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본 것이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는 교회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의롭게 된 성도들이, 죄 가운데서 살아가며 멸망할 불신자들에게 판단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바울은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하나님의 법을 잘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오직 이 세상에서 적용되는 세속법만을 가지고서 문제를 심리하는 것은 부당하며 이를 금지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교회 내에서 일어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만큼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은 마지막 때에 주님과 함께 온 세상과 천사들을 판단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2-3절 봅시다. “(고전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고전 6: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마지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 세상을 판단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배도하고 범죄한 천사들까지도 판단한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가진 존귀한 권세 입니다. 즉 성도는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과 함께 심판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영적 권세를 가진 자들 입니다. 따라서 고린도교회가 이와 같이 교회 내에서 일어난 분쟁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불신자들로 구성된 세상 법정에 판단을 요구하는 것은 바울이 볼 때 옳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4절을 봅시다. “(고전 6: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이 말을 다시 풀어 말하면 “여러분 사이에 생긴 사소한 분쟁거리를 놓고, 어찌하여 여러분은 교회가 하찮게 여기는 세상 사람들을 여러분의 재판관으로 세운단 말입니까?”하고 바울은 말하며 하나님의 뜻과 말씀의 원리를 모르는 자들을 재판관으로 세우지 말라고 권면 했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내에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크게 책망 했습니다. 5절 봅시다. “(고전 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설로 자신이 더 지혜롭고 잘났다고 자랑하고 교만했으나, 실상은 자기 내부의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만큼 얼마나 어리석고 초라한 사람들인지 바울이 그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참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성도가 서로 분쟁하며 송사한다면 이미 그것은 패배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고전 6: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여기서 ‘허물’이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패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미워하여 다투고 서로 피차 간에 송사한다면 이미 그것은 영적으로 패배한 것이라는 뜻 입니다. 겉으로 보면 세상 법정에서 이기는 사람이 승자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함께 신앙생활하는 형제를 사랑하는 태도는 저버리고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좇는 그 모습이야말로 이미 영적으로 패배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입니다.
7절을 이어서 봅시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이와 같이 성도들이 피차 송사하여 미워하고 다투는 것 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세상 법정에서 서로 다투고 싸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세상에 손가락질 당하는 것보다 나 한 사람이 차라리 억울한 사람이 되어 불의를 당하고, 상대방의 거짓 술수임을 알고도 속아 넘어가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은 정말 따르기 어려워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손해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 입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상대방의 고발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나쁜 사람으로 여겨지고, 손해 보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한 번 예수님의 가르침을 떠올려 보십시오. “악한 자를 대적지 말고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오 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 리를 동행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세상은요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손해보고 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르침은 이와 정반대 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손해를 보더라도 참고 가해자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것 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 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 내가 받을 손해를 참지 못해 그리스도인들이 상호 간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예수님의 정신에 명백하게 위배되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상호간의 분쟁을 가지고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간 것 자체가 사랑은 온데 간데 없고, 서로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앞섰기 때문 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마음으로 다가오지 않으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면 이것은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손해를 보거나 억울한 일 당하면 당연히 법정에 고소해서 손해를 당하지 말아야죠! 물론 그러할 때도 필요합니다. 성경이 일반적인 범죄 행위에 대한 고발이나 고소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기 당했으면 피해 신고 해야죠. 도둑이 들었으면 당연히 고소 해야죠. 그러나 바울은 지금 성도들 간의 분쟁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분쟁의 때에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온전히 자기 이익을 위해 세상 법정에까지 소송한다면, 그 교회 안에서 어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이웃 사랑의 정신이 실천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 미움과 다툼 밖에 남지 않는 것이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고발하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같은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고 있는 ‘형제’라는 점을 강조 합니다.
우리나라 말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하나된 공동체가 바로 교회 입니다. “저는 너희 형제로다!” 이 말은 고린도교회 안에 ‘형제애’가 상실된 것에 대한 사도 바울의 비판이었습니다. 불의를 행하고 속인 것도 심각한 죄이지만, 그리스도께서 그의 핏값으로 사시고 그의 희생을 통하여 맺어주신 영적 형제들을 고발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한 것은 더욱 심각한 죄악 임을 사도 바울은 가르치며 고린도교회를 책망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 중에 다툼이 일어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하시겠습니까? “저 사람이 내 한쪽 다리 부러뜨렸으니까? 난 저 양반 두 다리 모두 부러뜨리겠다!” 하시겠습니까? 바울은 차라리 우리가 손해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상대편에게 오른뺨 맞으면 배로 갚아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왼쪽 뺨도 때릴 수 있도록 내어주라고 했습니다. 이는 세상의 원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르침 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뒤에서 욕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자들…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자들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사람들로부터 내 자신의 옳음을 인정받기 위해 함께 신앙생활하는 형제와 자매를 비난하거나 그들의 영혼을 죽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손해봐야 하는 것이 있더라도, 이익을 선택하기 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사랑하기 위해 낮아지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사랑하기 위해 자진하여 억울한 상황에 처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신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과 같이 내 자신의 이익보다 사랑하는 길을 선택하며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