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9] (전체예배영상) 마가복음 시리즈 (10) 상처 난 인생을 고치시는 예수 그리스도 (마가복음 8장 22-26절)

이 세상에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육체의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있지만,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인생의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가진 이 상처를 예수님께서 치유하실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일까요?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의 상처들을 어떻게 치유해 가고 계실까요? 상처 난 우리 인생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요?

1. 상처 난 인생에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오늘 본문 속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벳새다’라는 마을에 도착하시는 장면으로 시작 됩니다. 뱃세다는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성읍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알아보고 소경 하나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께 소경을 데리고 왔습니까? 소경의 삶에 묻은 상처를 고쳐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왔습니다. 축구 하다가 무릎이 까졌거나, 길을 걷다 전봇대에 부딪혀 멍이 든 상처라면 치유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거에요.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소경’ 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거에요.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 현대의학으로도 고치기 힘든 것이 눈의 질병 입니다. 아무 의료 기기도 없고, 심지어 눈에 바르는 약조차 없는 상황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 치유 불가능한 상처 입은 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벳새다 사람들에게는 ‘치유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이지만 예수님이라면 고쳐 주실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와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들은 이러한 믿음을 가졌을까요? 벳새다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5천명의 무리를 배부르게 먹이셨던 곳 입니다. 따라서 ‘오병이어와 같이 큰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시라면,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도 가능하시지 않을까?’하는 기대와 믿음이 저희에게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29장 18절을 보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을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표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 속 사람들이 소경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는 것은, “나사렛 예수가 곧 구약성경에서 오시리라 예언 되었던 그 메시아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생의 모든 고통과 문제를 치유하고 고쳐 주실 ‘메시아’로 믿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본문 속 소경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과 같은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고치지 못하는 삶의 문제라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고치실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다 읽어봐도 성경 가운데 예수님께서 벳새다에서 행하신 기적은 오병이어와 오늘 본문의 소경을 고치신 사건,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오늘 직접 벳새다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 한 사람의 상처를 고치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년 반이라는, 어떻게 보면 참 짧은 공생애 기간입니다만, 주님은 그 시간 안에서 이 한 사람의 인생의 상처를 고치시기 위하여 이곳 벳새다까지 친히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라면 나머지 아흔 아홉마리의 양을 두고, 길을 찾아 떠난 목자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혹시 내 자신의 상처를 보며 하나님께 잊혀진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들의 상처를 고치시기 위하여 우리 삶 가운데 찾아오고 계십니다.

2. 상처 난 인생을 만져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막 8: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을 고쳐 주시길 간구하며 그에게 ‘손 대시기를’ 구했습니다. 이 말은 ‘안수하여 주시기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몸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은 잘 만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병든 자들 혹은 상처가 나 피를 흘리거나, 아픈 자들은 영적으로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몸이 닿으면 자기 자신도 부정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웬만해서는 병든 자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병든 자에게 ‘손을 대 주시기를’ 간구한 사람들의 요청을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 하셨나요? 23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막 8: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손을 내밀어 친히 소경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이 사람은 눈 앞이 보이지 않았으니, 아마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손을 지긋이 잡았을 것입니다. 23절에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할 때 ‘붙들다’는 헬라어 단어가 ‘에필라보네노스’라는 단어 입니다. 이는 사람이 어떤 대상을 붙잡을 때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붙들 때 사용하는 단어 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의 손을 붙잡으셨습니까? 그의 삶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그의 손을 붙잡으셨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고칠 수 없었던 이 사람의 인생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고치시기 위하여 주님은 소경의 손을 지긋이 붙잡아 주신 것입니다.

지난 1997년 12월 한국의 겨울은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눈이 많이 내리고 기온이 떨어져서 추운 것도 있었습니다만, IMF 외환위기로 인해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고, 기업들이 부도나고, 가장들은 실직을 겪어 수많은 가정들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무너진 겨울이었기 때문 입니다. 든든한 평생 직장이라 믿었던 회사가 문을 닫았고, 하루 아침에 길거리에 대책없이 내몰렸습니다. 당장 살 길이 막막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몰라요. 개인파산을 신청한 사람들도 정말 많았고요. 여기저기 구제를 요청하는 비즈니스들, 부도난 사업장도 참 많았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기독교 역사상 1997년 IMF 때만큼 한국 교회가 하나님을 향해 크게 부르짖었던 때가 또 있었을까요? 이와 같이 나라 전체에 큰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 당시 전국적으로 교회나 기도원에서 가장 많이 불렀던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바로 IMF가 터진 같은 해인 1997년 초에 나온 노래였어요. 그 찬양이 바로 김석균 목사님이 작곡한 곡 ‘주님 손 잡고 일어서세요.’ 입니다. 가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신 축복 미리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이 찬양 아시는 분들은 후렴만 한 번 같이 불러볼까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이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내 삶의 모든 것이 끝났다고 좌절하고 남 몰래 눈물 흘리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 손을 붙잡고 계신 분이 계세요. 그리고 그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기만 한다면 이 찬양의 고백처럼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에 그 누가 소경이 다시 눈을 뜰 수 있다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그의 손을 붙드셨을 때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 본문 속 기적을 행하신 그 예수님께서 오늘 나의 손을 붙잡아 주신다면 우리의 삶에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놀라운 반전의 은혜, 치유의 은혜, 회복의 은혜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 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주님의 손 꼭 붙잡고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23절 말씀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예수님은 이 소경의 손을 꼭 붙들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고칠 때 대부분 공개된 장소에서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격리 된 장소에서 치유 이적을 행하십니다. 마가복음 전체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사람들이 없는 격리 된 공간에서 사람을 고치신 사건은 총 3번 등장합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 내신 사건, 우리가 지난 주일 살펴 본 귀먹고 혀가 어눌한 자를 고치신 에바다 사건,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시는 사건 이렇게 단 3번 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공개된 장소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장소에서 치유를 행하시는 이유는 예수와 병든 자와의 상호간의 인격적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방해로부터 멀어진 것이나 혹 이 아픈 병자가 예수님을 의지하는데 방해가 없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너무나도 큰 이적이기에 기적을 보고 흥분으로 들뜬 사람들로부터 예수님께서 환자를 격리시켜 그의 마음을 안정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치유하시는 장면을 한 번 살펴봅시다. 23절에 예수님은 소경의 두 눈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침을 뱉으신 것은 참 독특한 장면 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에바다 사건에서 보았듯이 그 때도 예수님은 혀가 어둔한 사람에게 침을 뱉어 고치셨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침에 어떤 특별한 효능이 있었다고 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통해서 이 사람이 고침 받았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치유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친히 그에게 침을 뱉으셨습니다. 자,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안수하십니다. 어떠한 모습으로 안수 하셨을까요? 우리는 흔히 안수하면 머리에 한 손을 얹는 장면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보면 ‘손’이란 단어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은 두 손으로 이 사람의 몸에 손을 얹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두 눈에 자신의 두 손을 직접 얹으신 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말 한마디로 폭풍우를 잠재우신 분이십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그런 주님께서 오늘 병들고 온전치 않아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의 손을 친히 붙들어 주시고, 자신의 양 손을 그의 몸에 대시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통해 절망과 좌절에 빠진 인생들, 고통과 아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한 주 하나님 아버지의 진하고 애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로 한 순간도 우리를 홀로 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붙잡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3. 상처 난 인생을 온전히 회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오늘 본문 속 사건의 한 가지 특징은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오직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 중 2단계에 걸쳐서 치유가 진행된 유일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귀머거리가 곧바로 들었고, 중풍병자가 곧바로 일어났고, 죽은 아이도 곧바로 살아났습니다. 여태까지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치유하실 때 2단계에 걸쳐서 하신 적이 없으세요. 그렇다면 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2단계에 걸쳐서 이 소경의 눈을 치유 하셨을까요?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것을 본문 사건 바로 이전에 나온 사건과 연결시켜 해석 합니다. 오늘 사건이 있기 바로 전 예수님은 자신이 행한 두 가지 놀라운 이적을 보고도,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이신지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spiritual blindness 영적 장님 됨을 책망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18절을 봅시다. “(막 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두 가지 놀라운 기적이 무엇입니까?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 입니다. 마가복음 8장 19-2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막 8: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막 8: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막 8:21)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제자들은 오병이어로 5천명이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가 남은 사건과 칠병이어로 4천명을 먹고 일곱 광주리가 남는 놀라운 기적을 현장에서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구나!” 하고 책망하셨던 것이죠. 그리고 나서 마가복음은 바로 오늘 본문으로 이어지며, 두 단계의 치유 단계를 통해 사물을 완벽하게 분별할 정도로 시력을 회복한 소경을 통해서, 두 번의 기적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을 책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이 소경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알아보는 영적 안목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 주셨고, 예수님은 이 소경이 온전하게 볼 때까지 고쳐주셨습니다.
처음에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안수해 주셨을 때 흐릿하게 보았습니다. 23-2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막 8: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막 8: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여기서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는 말은 “예수님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 사람이 사람을 알아본 것으로 미루어볼 때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는 아니고 중간에 어떤 불의의 사고로, 혹은 육체적 결함으로 후천적으로 소경 된 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치유를 끝내시지 않고 다시 한 번 이를 고쳐 주십니다. 25절 입니다. “(막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우리 주님은 또 다시 이 사람에게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이 사람의 한 번 뚫어지게 바라보니까 시력이 완전하게 회복되어 이제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여태까지 앞을 전혀 보지 못하여 온 세상이 컴컴했던 이 사람 입장에서 보면, 움직이는 사람의 형체라도 알아볼 수 있게만 되었어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을 끝까지 고치셨습니다. 온전하게 고치셨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점심 시간에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가 생긴 일입니다. 공중에서 높이 날아오는 공을 헤딩하기 위해서 머리를 쓰다 그만 허공에서 친구와 머리를 심하게 부딪힌 일이 있었습니다. 친구의 앞니에 제 이마가 찍혀 그만 눈썹 바로 위 이마가 찢어졌습니다. 피가 얼마나 많이 났는지 곧바로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나이가 지긋이 든 남자 할아버지 선생님이셨는데, 피를 줄줄 흘리는 저를 태연한 표정으로 보시고는 피를 닦아 주시고 응급 처치를 해 주신 후, 바늘과 실을 가지고 제 이마를 꿰매 주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정말 걱정 하나 없는 표정으로 저를 꿰매 주셨어요. 그리고 남의 일이란 듯이 태연한 표정으로 이제 가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어머니께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마를 꿰맨 제 얼굴을 보시더니 아들 얼굴에 흉질까 걱정이신 거에요. 제가 기억나는게 아들 얼굴에 흉터 남지 말라고 비싼 연고도 사다 주시고 틈날 때마다 봐주셨어요. 그 때 알았어요. “아, 어머니 마음이란 것이 자식에게는 상처의 흉터조차 남길 원하지 않으시는구나?” 부모는 자식의 몸과 마음에 상처 하나 남아 있지 않길 바라지 않습니까? 우리 삶의 상처들을 온전히 치유하시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 마음 입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를 치유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길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처 난 우리의 인생이지만, 우리 삶에 소망이 있는 것은 이 상처를 치유하실 수 있는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은 상처 난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상처 난 인생을 친히 만져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 삶을 온전하게 고쳐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인생의 어려움과 난관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한 주 이 치료하시는 주님,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복된 한 주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