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20 주님을 만나면 삶이 달라진다 (요한복음 20장 11-18절)

(요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요 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요 20: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 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요 20: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본 베드로와 요한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11절에서 사용된 ‘울고 있다’는 표현은 단순히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우는 ‘통곡’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마리아는 사라진 예수님의 시신에 대한 염려로 안타까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하며 통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후 그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도 못했음도 불구하고, 죽으신 예수님의 사라진 시신을 간절히 찾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목놓아 큰 소리로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는 몸을 구푸려 무덤 안을 살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무덤 안에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누어 있었던 곳의 머리 편에 있었고, 또 다른 천사는 예수님 시신의 발이 놓여 있어야 하는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통곡하며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러한 천사들의 질문에는 “여자여 어찌하여 우는가? 그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느냐?”하는 리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없어진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승리의 증거가 되는데, 어찌 울고 있는가?’하고 물어보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 못하는 마리아는 자신이 울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 했습니다. “제가 울고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또 다시 이 대목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지, 예수님을 잃어버린 그녀가 얼마나 깊은 상심에 빠졌는지 보게 됩니다. 이 때 성경은 아주 흥미로운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이처럼 애처롭게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 뒤에 누가 서 계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경 학자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영광스럽게 변형 되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다른 본문에서 엠마오로 걸어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 모습을 잘 설명해 줍니다. 성경은 우리가 부활할 때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로 인하여 변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을 마리아가 알아보지 못했다는 견해 입니다. 두 번째 주장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알지 못했음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자신 앞에 서 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알아보지 못했다는 견해 입니다.
15절에 예수님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질문 하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앞서 두 천사가 마리아에게 물어본 질문과 완전히 동일한 내용 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마리아는 자신에게 질문하는 주님을 무덤을 지키는 동산지기로 착각 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혹시 “예수님의 시신을 당신이 옮겨갔습니까? 어디에 있는지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하고 요청 했습니다. 마리아는 순간적으로 ‘동산을 관리하는 자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긴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했던 것이죠.
바로 이 때 예수님은 그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지금까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던 막달라 마리아는 그제서야 자신 앞에 서 있는 분이 동산지기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16절에 마리아가 묻습니다. “랍오니여” 이는 히브리어로 “나의 선생”이라는 뜻 입니다. 그러나 이를 풀이하면 “나의 친애하는 주여!”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죽은 줄만 알았던, 죽은 후 시신마저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께서 자신 앞에 그것도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몸으로 나타나자 무한한 감동을 느꼈을 것입니다. ‘랍오니여!’하고 불렀던 막달라 마리아의 이 단어에는 그녀의 깊은 사랑의 마음이 다 담겨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지막 날에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막달라 마리아의 고백과 같이 기쁜 마음으로, 사랑의 마음을 가득 담아 주님을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7절에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는 사실 ‘만지지 말라’라는 뜻 보다는 ‘붙잡지 말라’라는 번역이 더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서신을 보면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 도마에게 자신의 못 박힌 손과 발을 만져보고 창에 찔린 옆구리를 만져보고 믿으라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만지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만지지 말라’는 말은 손가락 끝으로 만져 보는 것이 아니라, 두 손으로 꽉 움켜쥐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아 주님을 꽉 붙잡고 있던 마리아를 향해 예수님은 자신이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은 상태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얼마 동안 마리아와 제자들과 함께 지내실 것을 말씀하심으로 마리아가 예수님을 꽉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를 전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처음으로 주신 명령은 무엇입니까? 17절 중반을 봅시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서 자신의 부활의 소식과 곧 승천할 것을 전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에게 찾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을 전파했습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주님의 부활 소식을 세상에 전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막달라 마리아의 삶은 한 마디로 ‘통곡’이었습니다. ‘눈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그녀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 했습니다. 이전에는 한 없이 울고 있던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삶의 모든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을 전파하는 참된 부활의 증인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