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4 세상의 속임수를 경계하라 (여호수아 9장 1-27절)

지난 2018년, 신문에 친한 친구의 사주를 받아 사람을 죽인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자신의 친한 친구를 시켜 사람을 살해하도록 부추긴 것이죠. 어려서부터 나쁜 친구를 사귀어 함께 어울려 다니다 보면 자칫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쁜 짓에 함께 빠지게 되고 삶을 망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선한 영향력을 주는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종이를 향 가까이에 두면 향내가 아니고, 생선 가까이에 두면 생선 비릿내가 배는 것과 같이,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차츰 물들어 가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때 반드시 ‘그 땅의 거민들과 어떠한 약조도 맺지 말고 하나도 남김없이 멸하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가나안 사람들의 타락한 성적 문화와 그릇된 이방신 숭배 사상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닮아갈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음란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들의 영향을 받아 범죄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가나안 사람들을 멸하고 완전히 파괴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거하는 거민 중 하나인 기브온 사람들과 그만 약조를 맺고 그들을 살려주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아이성을 정복한 시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승전의 기쁨에 한참 도취 되었을 때 경계가 풀어져 그만 적군의 꾐에 어리석게 넘어가 버리고 만 것이죠. 이스라엘이 기브온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세상과 타협하여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도 넘어지고 실수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자꾸만 유혹하고,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의 세속화를 막고,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올바른 신앙을 고수한 채 말씀대로 살 수 있을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함께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1. 세상의 달콤한 유혹을 경계하라
먼저 본문의 스토리를 함께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철옹성으로 여겨지던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아이성마져 쓰러뜨리니, 겁에 질린 기브온 거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나안 족속인 것을 숨긴 채 이스라엘 백성들과 약조를 맺자고 요청 했습니다.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청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8절 말씀을 봅시다. “(수 9:8)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기브온 족속들은 아무 조건도 없이 이스라엘 백성의 종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무려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던 민족 입니다. 또한 지난 40여년 동안 광야에서 나그네처럼 방랑자처럼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 앞에 다른 민족이 와서 ‘목숨만 살려주면 친히 당신들의 종이 되어 주겠다’고 약조하자니까 겉으로 보면, 얼마나 기쁘고 맘에 드는 조건입니까?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여호수아는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1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수 9: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회중이 맺은 이 맹세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결정이었습니다. 이 약조로 인해 가나안 백성을 살려주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족장들의 판단력이 이토록 흐려졌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판단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고 이익이 된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택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의 판단 기준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입니다. 이익이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더라도 선택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익하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에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람을 속이기도 하고, 법령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돈이나 물건을 소유하기 위하여 비인간적인 행위도 서슴없이 하는 일들이 얼마나 이 세상에 비일비재 합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본문 속 여호수아와 회중의 족장들이 따른 판단 기준이 바로 이 세상의 판단 기준과 똑같았습니다. 이들은 기브온 족속이 자신들의 ‘종’이 되어주겠다는 한 마디에 두 번 고려해보지도 않고 바로 허락 했습니다. 왜요? 그것이 그들에게 엄청난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당시 사회는 농경 사회 입니다. 알다시피 농사를 짓는 데에는 엄청난 인력이 요구 됩니다. 땅을 뒤엎고, 밭을 갈고, 소를 몰고, 벼를 배고, 우물 에서 물을 퍼 오르고 등등 농사를 하기 위해 해야할 일이 끝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허드렛일을 ‘종’들을 대신 시킬 수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안락하고 편안 하겠습니까? 아마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족장들은 기브온 사람들이 ‘종’이 되어주겠다는 말이 그들의 귀에 매우 달콤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유익만 계산해보고 민족 대 민족의 약조라는 엄청난 사안을 하나님께 한 번도 묻지도 않고 허락해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4-1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수 9: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수 9: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14절 말씀을 유심히 보십시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족장들은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결정 했습니다. 왜 성경은 이 말씀을 기록했습니까?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이것이 내게 유익한가?’의 기준을 놓고 판단하며 사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 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이 세상의 판단 기준은 ‘이것이 내게 유익한가?’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한 세상의 판단 기준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판단 기준으로 살아야 합니까? 기독교인이 가져야 하는 판단 기준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것이 하나님 보실 때 옳은가?’ 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기브온 족속과 약조하는 것은 분명 유익합니다. 농경사회에서 타민족을 종으로 두고 마음껏 부릴 수 있다는 것은 넘기기 분명 힘든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보실 때 옳은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도 남김없이 멸하라고 명령하신 가나안 족속이었기 때문 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한 번 우리 시대로 가지고 와 봅시다. 예를 들면 오늘날로 따지면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연봉을 3배 올려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한 번 가정해 보십시오. 제안만 받아도 얼마나 가슴이 뛰고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그 회사가 분식회계를 하고, 경영자가 부도덕한 방법으로 개인의 이익을 취하며, 우리에게 그 사실을 숨길 것을 부추긴다면 어떻겠습니까? ‘이것이 내게 유익한가?’를 기준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것이 하나님 보실 때 옳은 것인가?’를 기준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이익을 따라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더욱 더 죄로 인해 망가져 버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소수의 이익 때문에 더 큰 피해를 보았고, 이들과 얽혀 있는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양심을 속이고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선택은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과 이웃들의 삶 또한 파괴하는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세상의 유혹을 조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선택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유익하고,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큰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 하더라도, 먼저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바른 선택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하는 생각들을 해봐야 합니다.
우리 시대는 ‘돈’이면 다 허용되는 세상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돈을 버는 일이라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하는 것은 묻지도 않고 따져 보지도 않고, 물불 가리지 않고 하는 세대 입니다. 양심도, 윤리도, 사랑도, 섬김도 없는 비인간적인 세상의 형편이 되어 버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돈’을 버는 매력적인 기회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하나님 보실 때 합당한 방식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정당한 방법과 올바른 수단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전에 영국의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인이 정당한 노동 없이 땀 흘려 일하지 않고 쉽게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부자가 되는 것, 출세하는 것 자체가 죄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성경이 강하게 경계하고 주의하는 삶의 모습은 은이나 금을 하나님의 은총보다 먼저 선택하는 자들 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가 넉넉한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복의 원천은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따라서 세상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복된 사람 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유익한가?’가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 보실 때 옳은 것인가?’을 우리 삶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세상의 강한 유혹과 타협을 종용하는 거짓을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2. 세상의 거짓과 속임수를 경계하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여호수아와 같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도 기브온 거민의 간교한 계략에 속아 넘어 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꾀를 내었는지 함께 살펴봅시다. 3절에서 6절 말씀 입니다. “(수 9:3)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의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수 9:4)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수 9:5) 그 발에는 낡아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예비하고 (수 9:6) 그들이 길갈 진으로 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원방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 기브온 거민들은 자신들이 가나안 족속 임을 속이고 먼 곳에서 찾아온 이방족속처럼 가장 했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이들이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민족이란 것을 알았더라면, ‘당신들의 종이 되겠다’는 달콤한 유혹도 이겨낼 수 있었을 것 입니다. 그래서 기브온 거민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속이기 위해 자신들의 신분을 감춘 것이죠.
또한 이들이 얼마나 간교한 지 여호수아를 속이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였습니다. 9-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수 9:9)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인하여 심히 먼 지방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명성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수 9:10) 또 그가 요단 동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곧 헤스본 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 기브온 족속은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이 되려고 하는 것은 ‘여호와’의 하신 일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믿는 것처럼 여호수아를 속였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회중의 족장들은 기브온 백성의 꾀임에 넘어간 것이죠.
지금도 교회 안에서 같은 성도들 간에 사기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어느 한 성도가 다른 성도를 속이고 재산을 가로채거나, 부당한 계약을 맺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질까요? 상대방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올 때가 많기 때문 입니다. “제가 기도해 봤는데, 하나님께서 집사님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라고 하셨어요.” 이런 식의 교묘한 거짓말들이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흔드는 거죠. 이 시대에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사람을 속이기 위해 함부로 사용하는 자들을 매우 주의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기브온 족속이 여호수아를 속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 했듯이,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람을 속이는 사기꾼들이 있음을 기억하고 주의하십시오.
특별히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며 한국의 신천지가 떠올랐습니다. 왜 신천지가 기존의 성도들을 포교할 때, 교회에 들어와서 성도인 척 가장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할 때, 그리스도인들의 경계가 비교적 쉽게 허물어질 때가 많기 때문 입니다. 사탄은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성경공부인데, 알고 보니 신천지 교리 공부 합니다. 겉으로 보면 교회 간판 걸고 있는데, 알고 보니 이만희 섬기는 이단 집단 입니다. 겉으로 보면 상냥한 교인인데, 알고 보니 신천지 파수꾼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이러한 교묘한 거짓 기브온 족속이 버젓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기브온 족속의 간교한 계략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도 거짓 세력의 꾀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3. 기도하지 않는 삶을 경계하라.
여태까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 잘 싸워 왔습니다. 기도를 통해 요단 강을 건너왔고, 기도를 통해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된 백성은 기브온 족속과의 약조를 앞두고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앞서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본문 14절 말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알아보지 아니하고 성급하게 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앞서 아이성 전투에서 이들이 실패한 이유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아니하고 정탐꾼들의 말만 믿고 전투했다는 사실 입니다. 즉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묻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아이성 때에도 정탐꾼들의 말만 듣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아서 전쟁에서 패했고, 이번에도 기브온 거민들의 말만 믿고 또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아서 잘못된 약조를 맺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으면 그의 영적 분별력, 영적 통찰력이 둔해집니다. 사람마다 지혜의 정도가 다르고 명철의 크기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스스로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기도한다면 그의 지혜는 세상의 현자보다 뛰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함께 봅시다. 야고보서 1장 5절 입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지혜를 후하게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자는 분별력을 갖게 되고, 통찰력이 날 선 검과 같이 예리해 집니다. 거짓을 파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진리를 파악하는 명철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상의 하지 않고 결정하는 일은 실패하게 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과 상의하지 않고 결정하는 모든 일은 이미 실패한 일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 때문에 일이 늦어지기도 하고 연기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서둘러 결정하게 될 때 오히려 더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은 늘 서둘러 결정하다가 큰 실수를 범하기 마련 입니다. 그러니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은 그의 약속대로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족장들은 기브온 거주민들과 약조를 맺는 것이 큰 문제라 생각하지 않고, 작은 일이라 여겨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실수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큰 문제, 작은 문제 가리지 않고 모든 일에 대해서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만일 이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결정하였다면 실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 묻지 않아 결국 망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들에서 홀로 양을 치는 목동일 때에도, 광야에서 살아가는 도망자일 때에도 언제나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잠언의 두 가지 말씀만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여 사는 사람은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로 묻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는 잠시 고난과 인내의 시절이 있어도 결국에는 존귀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 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달콤한 유혹과 거짓과 속임수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묻고, 지혜를 구함으로 우리는 이 모든 거짓 세력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서 승리하고 존귀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