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0 (성금요예배)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사야 53장 6-7절)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일반적으로 ‘양’이란 동물은 매우 온순하고,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짐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양을 기르는 중동 지역 사람들이 보는 양에 대한 인식은 매우 다릅니다. 양은 매우 고집이 세고, 자주 다른 양들과 서로 치고 박고 싸우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란이나 이라크 같은 지역에서 가장 상스러운 욕 중 하나가 상대방을 향하여 ‘양 같은 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얼마나 양에게 안좋은 면모가 있으면 중동사람들이 상대방을 모욕할 때 ‘양’으로 비유하는 것일까요? 양이란 동물이 주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동물이 아닙니다. 덩치가 제법 있는 큰 양들은 힘도 세서, 앞발로 버티고 있으면 목자들로 좀처럼 끌고 가기가 어렵습니다. 양은 고집도 세지만, 시력이 좋지 않아서 길을 잘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양은 날카로운 발톱도, 강력한 이빨도, 빠른 발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자 곁을 떠난 양은 줄곧 늑대나 사자 혹은 곰과 같은 야생 동물의 먹이감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양은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시력이 좋지 않아 알지도 못하고, 효과적인 방어 수단도 없어 자신을 위협으로부터 지키지도 못하면서 동시에 자기 고집이 매우 강한 동물 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들을 바로 이러한 ‘양’과 같다고 비유하여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시력이 매우 나쁜 양이 목자를 떠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처럼, 내 인생이 지금 어디로 흘러가는지, 오늘 나의 선택이 내일 나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 입니다. 그러면서도 양과 같이 고집이 센 것이 우리들 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 자기가 원하는 인생의 모습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살고 싶은 바가 다르고, 추구하는 삶의 양식도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각 자기가 원하는 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삶을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우리 중 내일 일을 미리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의 이런 모습이 바로 양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양의 특성을 종합해 보면 한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양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라는 사실 입니다. 양은 목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연약한 존재 입니다. 양과 같이,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 입니다. 나 스스로의 힘으로 넉넉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자만심’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한 우리들의 죄악 입니다. 죄를 지을 능력은 있지만, 그 죄의 결과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것이 인간 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범죄함으로 인해 고통과 죽음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무리의 죄악을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죄인이 아닌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선지자인 이사야 자신도 이러한 어리석은 양에 포함 됩니다. 우리 모두도 죄악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 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 우리의 영혼을 죄악과 사망의 저주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아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를 지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본문에 사용된 “죄악”이란 단어가 ‘살인’, ‘간음’, ‘절도’, ‘방화’, ‘사기’와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범죄행위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영혼의 뿌리 깊이 자리잡은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죄악’의 정체 입니다.
우리는 다 양과 같습니다. 어리석습니다. 자기 고집이 무척 강합니다. 목자 되시는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그릇 행하고, 그릇 행하면서도 그것이 그릇된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보다, 내 자신의 생각을 더 믿었고, 혼자서는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없는 연약한 주제에, 하나님 없이도 홀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우리를 향하여 양과 같다고 표현한 것을 환원하면 “우리 모두는 무지 위에 악한 고집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악한 길, 죽음의 길, 저주의 길을 고집스럽게 가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무수한 경고를 무시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짓밟으면서도 자신의 길이 옳은 길이라고 스스로 확신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사야는 인간의 무지와 고집으로 빚어진 반역의 결과로 인간은 그릇 된 길을 걸어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죄악의 길을 걸어간 결과가 바로 고통과 사망의 저주 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이 저주에서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고 결국에는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이 처한 비참한 상태 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비참한 상태에 처해있는 인간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해결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죄악으로 인하여 고통과 죽음의 저주에 처해 이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누구의 해결책 입니까? ‘여호와’의 해결책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심판과 벌을 주시는 일에 연연해하시는 분이고,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으로 잘못 이해합니다. 그래서 공의를 강조하시는 성부 하나님과 사랑을 강조하시는 성자 하나님이 서로 갈등에 있다는 이상한 가르침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 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리스도께서 감당시키도록 하신, 이 대속을 계획하신 주체가 누구이십니까? 바로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도록 계획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이 죄에 대한 책임 있으신 것 일까요?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시면 하나님께서 손해 보시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할 그 어떤 의무도 책임도 가지고 있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성품이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그릇 된 길, 죄악의 길, 저주의 길로 들어선 우리들을 구원하여 다시금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로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이 세상 인류의 죄악이 더욱 점점 더 번영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습니다.
7절에는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우리의 죄악을 어떠한 모습으로 감당하셨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본문에서 ‘그가 곤욕을 당하여’라는 말은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 고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해 찔림을 당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인해 상함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채찍에 맞아 살이 찢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극심한 육체적 고난을 우리 주님께서 받으셨습니다. 본문에서 ‘괴로울 때’라고 표현한 것은 주님의 내면적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의 제자는 그를 배신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그의 제자들은 모두 그를 버리고 등을 돌렸습니다. 가장 가까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욕하고 부인했습니다. 그를 믿고 따르던 무리들도 그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쳤고, 그를 향해 침을 뱉고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습니다.
이와 같이 육체적인 극심한 고통과 참기 힘든 내면의 모욕 가운데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침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는 표현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우리는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의 고난의 침묵을 통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 받는 장면을 한 번 봅시다. 마가복음 14장60-61절 말씀 입니다. “(막 14: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막 14:61)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서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 받으시는 장면을 봅시다. 마태복음 27장 11-14절 말씀 입니다. “(마 27: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마 27: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마 27: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마 27:14)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님은 총독 빌라도 앞에서도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자신이 당한 고소에 대해서 주님은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이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보았습니다. 이대로 재판이 진행되면 주님은 사형에 처해질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자신 스스로를 위해 어떠한 변명도 변호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빌라도는 어떤 변호도 변명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이사야가 전해준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이 헤롯에게 심문 당하시는 장면도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23장 8-9절 말씀 입니다. “(눅 23: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눅 23: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이와 같이 예수님의 침묵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가야바 앞에서도, 빌라도 앞에서도, 헤롯 앞에서도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할 이 시간에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자신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려고 온 수많은 사람들의 간계 앞에서도 막힘 없이 진리를 선포하셨던 주님께서 어찌 심문 당하시면서는 그 입을 굳게 닫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만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신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가야바에게, 빌라도에게, 헤롯에게 심문 당하시면서도 주님은 아무런 변명도, 변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생전에 수많은 사람들을 진리로 가르치셨습니다. 지난 3년 반 동안 열명이 넘는 제자들을 양육했고,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각종 병든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눈먼 자, 다리저는 자, 문둥병자, 중풍병자, 혈루병에 걸린 자 등 각종 연약하고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주린 자들을 먹이셨고, 귀신들을 내쫓으셨고,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고, 성난 파도를 잠재우셨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들을 일으키셨고, 밤잠을 줄여가며 평생토록 헌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만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만 이 인간을 구원할 수 이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알았기에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바로 이 죽음을 위해 달려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 7절 말씀을 다시 봅시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곤욕을 당하시고, 정신적인 괴로움을 당하셨으나,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뺨을 때렸고,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주먹으로 치고, 납조각이 달린 채찍으로 그를 쳤습니다. 주님의 살은 뜯겨 나갔고, 주님께서 입고 계신 옷은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 피로 인해 불게 물들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주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었습니다. 날카로운 가시는 주님의 머리 살을 파고 들어가 예수님의 얼굴에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주님의 두 손과 두 발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로마 병사가 망치로 힘껏 내리친 세개의 못은 주님의 살을 찢었고, 뼈를 뚫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피가 쉼 없이 줄줄 흘러 내렸을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육신의 고통을 당하고 계신 예수님.. 그런 주님을 향해 사람들은 욕하고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9-42절 말씀 입니다. “(마 27: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마 27:40)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마 27: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마 27:4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와 같은 사람들의 조롱소리에도 우리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오늘 본문에서 예언한 대로 예수님은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만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입을 열고 한 마디만 하셨다면 충분히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하늘의 천군 천사를 향하여 명령하셨다면, 수천 수만의 천사들이 칼집에서 칼을 뽑고 주님을 구하기 위해 내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고, 흠도 없는 주님이시지만, 우리들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당한 비난과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위해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 성취될 하나님의 뜻을 위해, 또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이 잠잠하게 그 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목숨을 온전히 십자가에 내려놓으셨습니다.
미련한 양과 같이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며, 죄악에 빠진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성난 파도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죽은 나사로도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참을 수 없는 내면의 괴로움 속에서도 죽음을 감당하시고자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 온전한 순종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은 이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구원이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 것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을 대속 제물로 드리시는 희생과 고통을 감당 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삶을 목표로 살아야 합니다. 바람처럼 속히 지나가는 우리의 남은 삶은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고난을 친히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사랑하며 날마다 주님만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