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9 (고난주간 새벽예배) 우리를 위해 형벌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1) (이사야 53장 4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오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 입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를 혐오 했고, 멸시 했습니다. 그들의 얼굴을 돌려 예수를 무시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사람들이 꿈꾸고 있었던 메시아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 입니다.
유대인들이 꿈꾸던 메시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구약의 외경 중에 ‘솔로몬의 시편’(Psalms of Solomon)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1세기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꿈꾸던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막강한 왕 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단숨에 멸망시킬 분 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그 당시 전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을 무찌르고 지상에 있는 모든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발 아래 둘 것이라고 기대 했습니다. 이들이 바라던 것은 구약 시대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이 메시아를 통한 다윗 왕국의 재건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초월적인 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고, 막강한 군사력을 통치하는 왕과 같은 구원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메시아의 모습은 정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탄압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현세적으로 이스라엘의 번영과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메시아 였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가진 큰 무리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자기 겉옷을 벗어 예수님 가시는 길 위에 펴 드렸습니다. 또한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 했습니다. 이 때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바라던 대로 군사적 메시아, 정치적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에게는 메시아가 고난 당하고 죽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의 스승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성경 이사야 53장은 ‘메시아의 고난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이사야 53장을 ‘메시아적’으로 해석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천상적 존재, 초자연적인 인물로써 왕국을 다스릴 왕이지, 결코 낮고 비천한 사람으로써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고 고문당하는 사람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결국 그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그 동안 메시아라고 믿고 따르던 예수가 힘없이 체포되어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유대인들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습니다. 그 동안 예수가 메시아인 줄 알고 믿고 그릴 지지해 왔는데, 고작 로마 제국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다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로마의 정치적 폭압과 경제적인 착취해서 구원해줄 줄 알았던 예수가 로마 제국이 악질 죄수들을 사형시킬 때 쓰는 도구인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다니!’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해왔던 유대인들은 엄청나게 큰 실망감과 배신감을 가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예수를 보며 그는 거짓말쟁이며, 사기꾼이라고 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며 유대 지도자는 그가 메시아가 아님을 확신하며, 그를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누가복음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그런데 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말하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 입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저들의 질고를 지시고 저들의 슬픔을 당하신 것인데, 저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예수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오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르게 알지 못하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도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셨는데 그것이 그분에게 욕이 되어 버렸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십자가에 내려놓기까지 모진 아픔과 수모를 당하셨는데 그게 그분에게 수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했습니까? ‘무지’ 때문 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몰랐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 했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대신하여 질고와 슬픔을 당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은혜를 몰랐기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철저히 무시하고 핍박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고난으로 쌓여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이 당하신 ‘고난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으로 얼룩진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지신 고난에 대하여 그분은 사실 우리의 고난을 짊어지신 것이라고 선언 합니다. 이사야 53장 4절 말씀을 [우리말 성경] 번역본으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사 53:4) 그러나 사실 그가 짊어진 병은 우리의 병이었고 그가 짊어진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맞을 짓을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때리시고 고난을 주신다고 생각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은 자신의 죄와 허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질병과 아픔을 대신 짊어지신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경건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러한 의미를 알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기 때문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곧 십자가가 무엇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를 위해 죽음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나와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겨 주시고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히 갚아도 갚지 못할 사랑의 빚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자기 생각에 매여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조롱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감은 눈을 뜨게 하는 일, 어두운 귀를 들리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명 입니다. 세상으로 하여금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가 바로 우리의 구주이심을 증언해야 하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질병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가 겪은 모든 아픔은 우리의 아픔을 대신 겪으신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할 모든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세상에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를 위해 철저하게 자기의 몸을 찢으시고, 남김없이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 당하신 고난이 바로 우리를 위함임을 기억합시다.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오늘 이 하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