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7 (고난주간 새벽예배) 고난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사야 53장 1-3절)

이번 고난주간 새벽예배는 성도님들과 함께 이사야 53장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이사야 53장은 메시아의 고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 장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의미는 무엇이며, 또한 주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지 새롭게 깨달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시간으로 이사야서 53장 1-2절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사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말씀을 한 번 보세요. 1절에 이사야가 “내가 전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의 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사야 선지자를 포함하여 모든 하나님의 종들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와 동시대를 살아가던 하나님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의 이전시대에 살았던 하나님의 종, 그리고 앞으로 이사야 시대 이후에 태어날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포함합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동일 되게 전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1절에 사용된 ‘전한 것’이란 표현은 본래 히브리어로 ‘들려진 것, 혹은 들은 소식’을 의미합니다. 즉 1절 말씀을 제가 다시 번역해 보면 “우리가 들려준 소식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이사야 선지자가 질문으로 오늘 본문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죠. 자, 그렇다면 이사야가 들려준 소식, 아니 이사야 뿐만 아니라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모든 선지자들 그리고 시간을 뛰어넘어 앞으로 이 세상이 끝날까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동일하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메시야의 도래” 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메시지 입니다.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이며, 신약성경은 장차 다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사야 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전해주신 변함 없는 메시지가 바로 메시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끊임없이 주님의 종들을 통해서 이 메시지를 인류에게 전해지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메시아가 없이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없는 기독교는 상상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기독교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것이 곧 우리 신앙의 정수 입니다.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 그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또한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이해가 그에 대하여 어떤 믿음을 갖게 했는지는 그의 신앙과 인생은 물론 그의 영원한 운명까지도 결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하는 이 질문이야말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 번 스스로 대답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질문에 대하여 “그런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예수와 나는 아무런 상관도 관계도 없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성경에 기록된대로 그의 죄책을 스스로 지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들어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장차 다시 오실 분이시며, 그 분은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원자요,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주님의 백성으로 불러 주실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은 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하며,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으로 이끌어 주는 필수적인 요소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십자가의 거룩한 고난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우리가 들려준 소식을 누가 믿었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똑 같은 복음을 들려주어도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부인합니다. 말씀을 좀 더 봅시다. 1절 말씀을 다시 봅시다. “(사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여기서 ‘여호와의 팔’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란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라는 말입니다. 1절을 전체적으로 보면,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메시아 복음을 전해주고 들려주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파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믿은 것은 아닙니다. 또한 ‘여호와의 팔’, 즉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사람들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거에요. 이사야는 지금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죠. “우리가 메시아가 오신다는 소식을 전해줘도 왜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이 이 세상에 나타났는데도 왜 사람들은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이와 같이 그의 글을 읽는 우리에게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2절부터 기록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을 한 번 봅시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여기서 나오는 ‘그’는 누구입니까?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 입니다. 이 분이 누구시죠?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사야는 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거에요. 왜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으려 합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이 원하는 구원자의 모습하고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자신들이 상상하고 꿈꿔오던 이상적인 메시아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그 분을 자신들의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그럼 도대체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이셨습니까?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연한 순’같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긴 겨울이 끝나고 이제 막 땅에서 움트기 시작한 푸릇푸릇한 새싹 있죠? 새싹은 너무 연약합니다. 발로 한 번 밟고 지나가면 죽어요.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주님의 모습이 마치 그 새싹처럼 연약하다는 거에요. 극장에서 나오는 영화들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적들로부터 세상을 구원하는 주인공들은 다 하나 같이 어때요? 강합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주먹으로 벽도 부수고, 한 번 적을 치면 여러 명의 적이 동시에 쓰러집니다. 어떤 주인공들은 새처럼 하늘을 날라 다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에요? 이런 주인공이 가져야 할 공식 중 하나도 가지고 계신 것이 없으세요. 너무 초라해 보이는 거에요. 2절 다시 보세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니까 슈퍼맨처럼 힘이 센 것도 아니에요.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나 헐크처럼 근육이 울퉁불퉁하고 몸이 좋은 것도 아니에요. 그렇다고 할리우드 배우들처럼 금발에 새하얀 피부에 미소가 아름다운 분도 아닌 거에요. 말씀을 보니까 아무리 두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흠모할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거에요. 아기 예수는 어디에서 태어나셨습니까? 말 구유에요. 어감이 좋아 ‘구유’죠, 소 밥그릇입니다. 말 밥그릇 입니다. 소, 말, 나귀 침이 묻어 있는 더러운 것이 구유에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뉘이신 곳이 바로 그 구유였어요. 예수님 흠모할 만한 것이 없어요. 예수님의 고향이 어디에요? 가난한 촌구석 나사렛이었어요. 사람들이 말하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훗날 성경지리학자들은 나사렛이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나사렛 찾는 작업도 한참 오랜 세간이 걸렸어요. 예수님은 그 당시 가난한 직업 중 하나인 목수 아버지를 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어요.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습니까?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여길 봐도, 저길 봐도 흠모 할만한 것이 없는 거에요.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인 했어요?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 그들이 머리 속으로 꿈꿔오던 메시아는 이렇게 생긴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던 거에요. 예수님을 배척하고 멸시 했습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자에 대한 집착과 편견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사람은요, 누구나 다 자기만의 생각이 있고, 자기만의 기준이 있어요. 밖으로 말은 안해도 다 자기만의 고집이 있어요. 결혼 안 한 총각 처녀들은 미래 언젠가 만날 자기 배우자의 성격이나 외모에 대한 기준이나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거기에 그 사람이 맞는지 체크해 보는 거에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만의 생각이 있고 기준이 있는 거죠.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기 머리 속으로 그리고 있는 구원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다 자기가 원하는 구원자의 모습이 있어요. “만일 예수님이 진짜 구원자라면, 내 인생에서 이 문제만큼은 해결해 주셔야 해.” “만일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요런 것은 이렇게 처리해 주셔야 해.”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게 말은 안 해도 저마다 그 안에 심지어 하나님을 판단하는 소견이 있어요. 그래서 가끔 어떤 분들 보면 자신의 기준하고 하나님이 안 맞으니까 신앙생활 못하는 분들도 있어요. 하나님이 자기 맘에 안 든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계시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이런 분들 보면 누가 진짜 하나님인지 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 보다 더 위에 있는 것 같아요. 자기 마음에 들면 하나님 계신 거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그런 하나님은 없는 거래요.
이사야 선지자가 우리에게 지금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우리가 전한 소식을 누가 믿었느냐?” 구원자가 오셨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 사람들이 믿지를 않는 거에요. 왜요? 흠모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자기가 꿈꿔왔던 구원자가 아니라는 거에요. “십자가에 달려 죽는 구원자는 필요 없다. 나 사업이나 더 잘 되게 해주고, 돈이나 잘 벌게 해주고, 병 때문에 고생하지 않고. 건강하고 오래 살게 해주는 구원자를 원한다!” “내 자녀 잘 되게 해주고 좋은 집에 장가 시집 가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구원자를 원한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저런 구원자는 우리에게 필요 없다!”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고집과 편견이 느껴 지십니까? 예수를 부인하는 행위는 그래서 하나님께 반항하는 거에요. “우린 저런 타입의 구원자 필요 없습니다. 다른 구원자 주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어요. 오늘 이러한 편견이나 고집이 우리들에게도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나 이거는 도와주셔야죠.” “예수님이 정말 내 구원자시라면 이거는 해주셔야죠.” 이렇게 우리들도 내 기준과 내 소견대로 주님을 맞추고 하나님을 마구잡이로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 하나님 이거 들어 주셨으니까 정말 살아계시네.” “하나님 이거 안 해 주시는 거 보니까 안 살아계시나 보네.”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예수에 대해서 실망 했거든요. 자기들이 해달라는 거 예수님이 해주실 줄 알았는데 안 해주시니까 실망감에 배신감에 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확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오늘 이 설교를 듣고 계신 분들은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자의 모습이 내 기대와 다르다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사람의 최후는 결국 사망 입니다. 이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예수님으로부터 흠모 할만한 것 찾으려 하지 마세요. 내 기준에 맞추어 예수님이 이거 해주시면 구원자, 이거 안해 주시면 가짜, 이런 식으로 예수님 판단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볼 때 흠모할 만한 것, 아름다운 모양에 맞는 메시아를 찾는다면 여러분도 결국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릴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수려한 풍채도 없고 화려한 위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볼품이 없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이와 같이 종의 형체로 오신 것이 바로 우리들을 위함이었습니다. 본래 온 우주만물 중 가장 아름다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취하신 이 낮아지심을 묵상하며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 드리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