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다와 마리아는 중병에 걸린 오빠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위독한 상태를 알고도 예수님은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17절 말씀을 보니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고 그의 시체가 무덤에 안치 된지 벌써 4일이나 되었습니다. 죽은 지 4일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시체가 썩고 부패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났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나사로 남매가 살고 있던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매우 가까운 동네에 위치해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약 2마일 (3킬로미터) 정도 되는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많은 유대인들도 나사로의 장례 소식을 듣고 사랑하는 오라비를 잃어 큰 슬픔에 빠진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하여 베다니 나사로 집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처럼 나사로가 죽은 지 4일, 많은 위문객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 모인 시점에 예수님께서 베다니를 찾아오신 것이죠. 사람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을 향해 오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큰 슬픔에 빠진 마리아는 움직이지 못하고 집에 남아 오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을 마중 나온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일찍 오지 않으시고 뒤 늦게 오신 것에 대한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21절 입니다. “(요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어떤 중한 병이라도 능히 고치실 수 있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자신의 오라비가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더라면 자신의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오빠가 중한 병으로 아파하다 세상을 떠나 마음이 아픈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오빠가 죽은 후에 베다니에 오신 사실에 대한 야속함과 섭섭함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에 그녀는 예수님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요 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2절 말씀만 보면 마르다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구하면 지금이라도 그녀의 오라비가 살아날 것이란 신앙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장 3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하여 무덤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했을 때 마르다는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할 것을 염려하여 예수님을 저지 했습니다. 이로 미루어보아 22절에 한 말은 죽은 나사로의 즉각적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이러한 말을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23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그녀의 오빠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 하셨을 때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그의 오빠가 “마지막 날 부활”할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22절에 마르다가 말한 고백은 ‘지금이라도 죽은 자신의 오라비를 살려 주신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늦게 오셔서 병든 자신의 오빠는 죽었으나 예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다 주시는 분임은 변함이 없다는 마르다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입으로는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고 고백은 하고 있습니다만, 실제적으로는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자신의 죽은 오빠를 되살릴 수는 없다고 단정 짓고 있었던 것이죠. 우리는 여기서 마르다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마르다가 예수님이 생명의 창시자요 주인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지금 예수님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지금 제 오라비를 살려주십시오!”하고 당당하게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병든 자를 고치는 정도의 능력만 가지고 계신 분으로 이해했기에 그 이상은 기대도 하지 못하고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시고자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자신이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되시며 생명 그 자체이심을 선포 하셨습니다. 죽음을 정복하시고, 사망 권세도 이기신 생명 그 자체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바로 그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다시 한 번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느냐?”하고 물으신 것이죠.
이에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요 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고백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고백 했습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수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구원자라는 고백이며,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마르다의 신앙고백이 머리 속에서 머무는 관념적인 신앙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만일 마르다가 정말 자신이 입술로 고백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구원자 그리스도시요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더라면 죽은 자신의 오라비도 능히 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예수님 제 오라비가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 되시는 주님은 지금이라도 내 오라비를 살리실 수 있을 줄 믿습니다.”하고 고백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이건 못하시지…” 하는 제한적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마르다의 모습이 혹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예수님을 향하여 그리스도 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내 삶에 찾아온 문제들은 해결하지 못하시는 무능한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삶에 찾아온 어려움을 보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크게 한 숨 지으며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건 못 도와 주시나보다…”하고 생각하며 나 스스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거나 축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마르다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녀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지식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은 그녀의 삶과 괴리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문제가 너무 크게 느껴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라도 지금 당장은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부활이시요 생명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한 것입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후에 죽은 나사로가 부활함으로써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믿음도 마르다처럼, 내 자신의 한계에 갇혀 있는 믿음은 아닙니까? 절망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능히 고치시고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 절망과 고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 머리 속의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실제적인 모든 문제와 영역들을 주님께 맡길 수 있는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맡기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해결하지 못할 문제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우리의 한계 상황을 능히 놀라운 주의 은혜로 극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