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6] (전체예배영상) 요나서 시리즈 (1) 도망자 요나와 추격자 하나님 (요나 1장 1-17절)

서론. 요나서의 역사적 배경
구약성경에는 총 17권의 선지서들이 있습니다. 이 17권의 책들은 분량에 따라 ‘대선지서’, ‘소선지서’ 이렇게 두 가지로 분류 됩니다. 내용이 상대적으로 많은 5권의 책들은 대선지서로 분류되고, 내용이 적은 12권의 책들은 소선지서로 분류되는 것이죠. 대선지서에는 어떤 책들이 포함될까요?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입니다. 소선지서는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 구약성경의 뒷부분에 위치한 선지서들 입니다.
특히 소선지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미지의 땅과 같습니다. 교회 다니는 분들 중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와 같은 창세기, 출애굽기 이야기는 잘 알아도 오바댜가 누구를 대상으로 예언을 했는지, 미가가 무슨 내용의 예언을 했는지, 스바냐서가 무슨 내용인지 알지 못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소선지서 12권은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2권의 책 중에 그나마 가장 유명한 선지서가 있다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나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유명할까요? 이 책에 나오는 선지자 요나가 큰 물고기에게 잡아 먹혀 사흘 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뭍으로 돌아온 드라마틱한 사건이 너무나도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요나의 물고기 사건은 알아도, 요나서의 주제가 무엇인지까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저와 함께 요나서 전체를 살펴봄으로써 도대체 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갇혀야 했는지, 요나서에 나타나는 성경 주제는 무엇인지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이 시대의 시대적 배경을 한 번 살펴봅시다. 요나는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왕이 통치했던 B.C. 740년경 활동했던 선지자 입니다. 여로보암 2세 왕 당시 이스라엘과 자주 전쟁을 하던 국가 중 하나인 ‘아람’은 내분을 겪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 ‘앗수르’라는 거대 제국의 공격으로 심히 약해져 있었습니다. 이에 여로보암 2세는 아람이 약해진 틈을 타 영토를 확장하여, 이스라엘이 가장 번성했던 다윗 왕 시대의 영토까지 회복하게 됩니다. 확장된 영토와 함께 여로보암 2세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어 있고, 경제적으로는 크게 번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 2세 왕과 함께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영적 암흑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우상에게 절하며 살아가는 북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아람을 공략한 거대 제국 앗수르는 이제 다음 목표인 북이스라엘을 점령하려 하였고, 이에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협하는 두려운 적이 되었습니다.

본론.
1.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 도망친 요나
바로 이와 같이 이스라엘과 앗수르 사이의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나가 등장합니다. 요나서는 선지자 요나에게 하나님의 메시지가 임하며 시작 됩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욘 1: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욘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라는 큰 도시에 가서 그 성읍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멸망하게 될 것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느웨는 앞서 이야기했던 거대 제국 앗수르의 수도 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북이스라엘을 점령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저 원수 국가 앗수르의 심장과도 같은 수도에 들어가 그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다가올 심판을 전하며 회개의 결단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을 외면한 요나
당장이라도 북이스라엘을 집어 삼키려 하는 저 앗수르에 가서 그들의 죄악을 고발하라는 사명을 받은 요나는 과연 어떻게 반응 했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요나서 1장 3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가는 바로 이 장면이야말로 요나서가 구약의 모든 선지서들 가운데 갖는 가장 독특한 내용 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은 대부분 한결같이 하나님이 메시지를 주시면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달 했습니다. 물론 모세나 예레미야와 같이 자신의 자질 부족을 근거 삼아 하나님께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보내주십시오”하고 요청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엘리야처럼 중간에 지쳐서 포기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하나님을 피해 도망친 사건은 요나가 유일합니다. 너무나도 독특한 장면 입니다.
도대체 선지자 요나는 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버리고 도망친 것일까요? 혹시라도 원수 국가에 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일까요? 강대국인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에에 가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악을 비난하고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적에게 죽을 수도 있는 아찔한 사명 입니다. 작년 2019년 중동 지역에서 활동 중인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IS 대원들이 기독교인 남성 1명을 총으로 쏴 죽이고, 남성 10명을 무릎 꿇어 놓고, 그들의 목을 칼로 배어 참수하는 장면을 전세계에 영상으로 보냈습니다. 지금도 무슬림 국가에서는 선교사님들이 살고 있는 가정에 폭탄을 던지고, 동네 사람들이 칼과 도끼를 들고 교회에 찾아와서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협박 합니다. 국제 기독교 박해 감시 단체인 ‘릴리스 인터내셔널’(Release International)이 최근에 발표한 보고서를 보니까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중국은 온라인으로 예배 드리는 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구속 했습니다. 파키스탄의 경우 기독교로 개종한 경우, 개인 뿐만 아니라 가정 전체가 코로나19를 위한 방역 물품과 식료품 지원을 받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지금도 세계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도망친 이유가 이와 같은 박해와 핍박이 두려워 도망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나는 목숨을 부지하는데 급급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요나가 머물던 북이스라엘에서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 대략 700km 떨어져 있습니다. 서울-부산 왕복거리인 650km 보다 50km나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 입니다. 요즘에야 고속도로가 뚫려 있고, 길이 잘 닦여 있으니까 여행하기 쉽습니다만, 고대에는 장거리 여행 중에 강도를 만나게 될 확률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요나 입장에서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많은 심리적 부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러한 부담감 때문에 요나가 자신의 사명을 저버리고 도망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을 외면하면서까지 이렇게 도망치려 했던 것일까요? 요나는 앗수르가 미웠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북이스라엘의 적이요 원수인 앗수르가 멸망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이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이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자신이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그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는 이 메시지를 전했을 때 혹시라도 니느웨 사람들 중 자신의 회개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멸하지 않으실 것을 요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원수 앗수르가 회개하여 용서 받는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그들의 죄악 가운데 그대로 멸망하기를 내심 바랬습니다. 니느웨가 죄값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다른 이방 민족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생각은 요나와 달랐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버리고 여호와의 낯을 피해 도망친 것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고 있으니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저는 사실 요나서 뿐만 아니라 선지서를 볼 때마다 가장 부러운 장면이 바로 “여호와의 말씀이 아무개에게 임하니라”라는 대목을 읽을 때마다 저는 속으로 “주님 제게도 말씀을 주옵소서! 제게도 말씀이 임하게 하옵소서!” 이런 간구를 하면서 성경을 봅니다. 내 속에 부인하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경험은 얼마나 진귀하고 위대한 사건 입니까? 특히 출애굽기 같은 책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모세에게 임하매”라는 표현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몰라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소원 중 하나가 하나님의 음성이 똑똑하게 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나는 하나님의 선명한 말씀이 그의 영혼에 임하는 위대한 축복을 받은 선지자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이 귀한 주님의 말씀을 외면했습니다.
저는 이전에 요나서를 읽을 때마다 바로 이 대목이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내가 반드시 순종하겠지”하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나 역시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불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따금씩 새벽예배 때 기도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들려주실 때가 있어요. “영목아, 너 말이야 이렇게 이렇게 해라.” 그럼 제가 또 “주님, 지금 이렇게 말씀하신 것 맞습니까? 제가 정말 그렇게 할까요?” 기도해보면 정말 주님의 뜻이 확실한 것 같아요. 그렇게 주님의 뜻을 들었으면 순종해야 하는데 참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만, 그렇게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도 이런 저런 이유로 주님이 주신 감동대로 행하지 못한 경우들이 종종 있었어요. 그런 경험들이 있다 보니까 요나서를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요나를 보면서 “뭐 이런 선지자가 다 있어? 이러고도 이 사람이 선지자야?”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요나서를 보면 회개부터 나옵니다. “주님, 제가 요나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무시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내게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한 사람이 바로 저 입니다. 주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이런 회개의 기도가 나옵니다. 은혜를 받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은 성경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 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세요? 먼저 이것부터 확인합시다. 하나님의 음성이 지금 여러분의 삶 가운데 들리고 있습니까? 만일 이 질문에 ‘no’라고 대답하신다면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집중해서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말씀을 깊게 묵상하지 않기 때문 입니다. 혹 이 기도와 말씀 두가지가 있는데도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중대한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다 세상 것들을 사랑하여 그것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은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살아본 경험이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영적 귀머거리로 산지 오래 되다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 비정상이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심각한 상태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교제도 없고 소통도 없이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증거 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사데 교회를 책망하셨을 때처럼, 자기 스스로는 살아있는 신앙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 예수님 보실 때 죽은 영혼이나 다름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도망자 요나를 향해 고개를 가로 젓고 손가락질 하기 전에, 먼저 우리 삶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고 있는지부터 점검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임하고 계십니까? “(욘 1: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역사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외면한 요나
다시 한 번 3절 말씀을 봅시다. “(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 요나는 니느웨와 정 반대쪽에 위치한 ‘다시스’로 도망치려 했습니다. 앗수르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지도에서 볼 때 이라크 입니다. 북이스라엘에서 보면 동쪽에 위치한 나라 입니다. 그에 비해 다시스는 오늘날 지도로 보면 스페인에 위치한 도시 입니다. 북이스라엘 중심으로 보면 서쪽에 위치한 나라죠. 다시스는 스페인의 작은 항구도시로 추측이 되고 있습니다. 아직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이 당시 사람들에게 스페인의 다시스는 ‘땅의 끝’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하나님을 피하여 지구 끝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외면하고 완전히 반대편에 위치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출항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이 요나에게 있으라고 말씀하신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요나의 노골적인 불순종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머물고 계신 곳은 어디 입니까? 그곳은 하나님이 가라고 말씀하신 ‘니느웨’ 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 도망친 ‘다시스’ 입니까?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하나님이 나에게 있으라고 말씀하신 곳이 맞는지 반드시 기도와 말씀으로 점검하십시오. 이것은 단순히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지리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내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드시 점검해야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방향이 속도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에요. 어느 한 고등학생 남자 아이가 책상에 앉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이라 아이의 이마에서는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고 있습니다. 아이는 공부에 대한 열의로 밤새 공부했습니다. 부모가 볼 때 어린아이가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참 대견해 보입니다. 다음 날 아이가 학교 간 사이에 어머니가 아들의 방을 정리하기 위해 책상을 보다가 지난 밤에 공부하던 책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How to rob a bank.” “어떻게 하면 은행을 털 수 있는가?”에요. 이것을 아는 순간부터 엄마에게는 지난 밤 아이가 장시간 책상에 앉아 밤새 공부한 모든 것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헛된 공부죠. 나쁜 공부죠. 해서는 안되는 공부 입니다.
우리가 이 문화도 전혀 다르고, 말도 잘 안 통하고, 생김새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미국에 이민 와서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밤에 달 뜰 때까지 열심으로 일하며 살아갈 수 있어요.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인생이란 책상에 무슨 책이 펼쳐져 있는가?” 입니다. “How to become a millionaire?”, “How to buy a large house?”, “How to buy a fancy car”, “How to fulfill your innermost desires?” 혹시 이런 책들이 아닙니까? 저는 우리들의 인생의 책상에 펼쳐진 책이 성경이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What would Jesus do?” 이런 책이었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한 번 뿐인 인생인데 나중에 다 죽어갈 때 되서야 “내가 왜 그렇게 쓸데없이 바람을 잡으려고 아등바등 되며 살아왔을까?”하고 후회하는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손등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세상의 헛된 욕심 버리고, 영원토록 변치 않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니느웨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이 내게 있으라고 말씀하신 곳에 거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다시스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주를 피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영적 문제 입니다. 만일 내 삶이 다시스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나는 말로써는 인정 안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노골적인 불순종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현재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 요나의 모습과 같지는 않습니까? 어서 죄악을 끊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머물라고 하신 곳에 머물고, 하나님이 가라고 말씀하시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요나를 추격하시는 하나님

(1) 대풍(큰 폭풍)을 일으키심
자, 이와 같이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사명을 버리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이 때 요나가 탄 배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4절 말씀을 봅시다. “(욘 1:4) 여호와께서 대풍을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요나를 끝까지 추격해 오셨습니다. 사실 요나의 도망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습니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 손바닥 안에 있던 것이죠.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실상은 타조가 땅에 머리 박고 ‘중요한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중요한 현실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 그 누구도 주님을 피해 도망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 7-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 139: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 139: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시 139: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요나는 자신이 세상 끝으로 가면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있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에 올라가도 주님은 거기 계시고, 잠수복을 입고 바다 깊은 곳에 내려간다 할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거기 계십니다. 땅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그곳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려고 아무리 노력해봐도, 소용 없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앞에 계십니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신학적으로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 합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 입니다. 이 하나의 똑 같은 교리가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가게 됩니다. 지금 죄를 짓고 하나님을 피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소부재의 교리는 심판자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소부재의 교리만큼 큰 힘과 위로를 주는 교리가 또 없습니다. “어딜 가든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신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이번에도 요나를 추격하시는데 성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추격하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도망자 요나는 다시스로 향하는 배가 출항하자, “이제 됐다”하고 생각하고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가 타고 있는 배를 향하여 ‘큰 바람’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바람으로 인해 삽시간에 바다에는 천둥번개가 내려치고, 검은 비바람이 몰아 일고, 집채만한 파도가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바닷물이 얼마나 거셌는지 4절 말씀을 보니까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를 깨부술 만큼 위력이 센 파도가 매순간 배를 치고 있었던 것이죠. 배에 탄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파도에 배가 뒤집어지거나, 끊임없이 내리는 비에 배가 침몰될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지금 우리의 삶에 이 큰 폭풍과 같은 고난이 찾아오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폭풍 속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지금 내 인생에서 일어난 이 큰 폭풍과 같은 고난이 나를 부르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wake-up call’은 아닐까?” 물론 우리가 욥의 고난에서 보듯이,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이 꼭 우리가 무언가를 잘못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삶에는 이유나 원인을 이해할 수 없는 고난도 시험도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 처하게 된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서 진지하게 한 번 여쭈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 지금 제게 찾아온 이 고난은 어떤 의미죠?”, “혹시 이 고난을 통해 내가 깨닫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있을까요?”, “혹시 제가 주님 앞에 회개해야 할 죄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렇게 기도로 하나님께 물어보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그 이유를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하나님께서 안 알려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정말 이 고난과 역경이 우리의 죄 때문인 것이라면, 하나님은 대부분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서 돌아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저는 복음성가 중에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라는 찬양의 제목을 참 좋아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 매여 있다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매여 있는 그 줄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혹시 상상해 보신적 있으십니까? 쉽게 끊을 수 있는 고무줄이나 얇은 명주실일까요? 아니요. 절대로 끈을 수 없는 사슬 입니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라는 찬송가 3절을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의 사슬’로 단단히 매어 놓으셨어요. 아무도 이 은혜의 사슬을 풀 수 없습니다. 은혜의 사슬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의 사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8-39절 말씀 입니다.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쳐 보십시오. “Lord, catch me if you can!”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You can never run away from Me.” 혹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고 계시던 분 계십니까? 죄를 즐기며 살기 위해 그 동안 하나님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살던 분 계십니까? 그 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큰 폭풍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려고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모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배가 심하게 흔들릴 때 빨리 무릎 꿇고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주님! 하나님은 이번에도 이 죄인을 찾아내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돌아가게 가겠습니다.”

(2) 요나로 기도하게 하심
요나는 지금 여호와의 낯을 피해서 다시스는 도망치는 중입니다. 추격자 하나님은 오히려 요나가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모십니다. 5절 말씀을 봅시다. “(욘 1:5)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요나가 배 밑층에서 잠든 사이 갑판에서는 폭풍과 파도 때문에 난리가 났습니다. 사공들은 두려움에 패닉하며 각자 자신의 신에게 살려 달라고 소리고 있었고, 배가 가라 앉을까 염려하여 배에 실은 물건들을 배 밖으로 던졌습니다. 아마 사공들이 바다로 던진 물건 중에는 값이 꽤 나가는 무역품들도 있었을 거에요. 그러나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돈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지금 물에 빠져 죽을 위기인데 금이고 은이고 무슨 소용이에요? 결국 인생의 위기의 순간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자, 바로 이 때 이 배의 선장이 배 밑층에서 자고 있는 요나를 꺠우러 옵니다. 선장이 하는 말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6절 함께 읽겠습니다. ”(욘 1: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선장은 요나를 향하여 “자는 자여”라고 불렀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선장의 요나를 부른 호칭이 정확했다고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 요나는 실로 영적으로 깊이 잠이 든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장이 이어서 말합니다.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이 얼마나 웃기고 황당한 상황입니까? 요나는 지금 누구를 피해 도망치고 있어요? 그런데 선장은 요나에게 빨리 네 하나님께 기도해서 살려달라고 구하라고 했습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모신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모십니다. 그러니까 평상시 깨어 기도하는 복된 습관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도해야 할 하나님의 종 요나는 배 밑층에서 깊은 잠에 취해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그런 요나를 배의 선장을 통해 깨우시고 그를 책망하면서 “얼른 일어나서 네가 섬기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령하게 하셨습니다.
다시스로 피하는 요나는 그 동안 하나님께 기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안했을 거에요. 왜요? 죄를 지으면 기도가 안 나옵니다. 저를 한번 더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기도는 죄를 죽이고, 죄는 기도를 죽인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고 있는 요나는 기도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모신다.“ 기억나시죠? 그가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 모셨습니다.

(3) 요나로 자신의 ‘죄’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고백하게 하심
자, 갑판 위에 모인 선원들과 선객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이 폭풍우의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발생했는지 찾으려 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요나를 계속해서 추격해 오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결국 제비뽑기의 결과 요나가 뽑히게 되었습니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일순간 요나를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습니다. 8절 입니다. “(욘 1: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8절에 여러 개의 질문이 등장합니다. 폭풍으로 인해 다급해진 선원들의 목소리가 담겨져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이들이 물어보는 질문이 하나같이 여호와의 낯을 피한 요나 입장에서 가장 대답하기 곤란하고 싫어하는 것들만 다 들어가 있습니다. 아마 이 때 즈음에 요나는 속으로 “하나님 저를 찾아내셨군요!”하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요나에게 “Checkmate. I found you”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에 요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피해 도망친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게 됩니다. 9-10절 입니다. “(욘 1: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욘 1:10)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9절에서 요나는 자신의 입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온 세상의 창조주 이십니다. 이어서 10절에 요나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실토하였습니다.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하나님은 도망자 요나가 스스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의 죄를 고백하도록 하셨습니다.

(4) 우리를 추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저는 지난 한 주 동안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한 가지 질문이 제 머리와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요나가 그대로 도망가게 두지 않으셨을까?” 사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굳이 니느웨 가기 싫어하는 요나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에 주의 종 될만한 재목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조금만 더 생각해봐도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인구 수가 수백 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니느웨에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요나 한 사람 밖에 없었겠습니까? 아니요. 요나를 대체할 만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어요. 그 중에는 요나 보다 하나님 말씀도 더 잘 듣고, 요나보다 더 탁월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피해 도망치는 요나를 포기하지 않고 추격해 오셨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택하셨고, 끝까지 니느웨로 가기를 싫어했던 요나의 강한 의지를 꺾으면서까지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요나가 그대로 도망가게 두지 않으셨을까?” 한 주 동안 이 질문이 제 가슴을 깊게 터치 했습니다.
처음부터 불만과 불순종으로 속이 가득 찬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종으로 삼아 사역하시는 하나님… 저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 앞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 요나의 스토리가 내 이야기였구나?”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 입니다. 백화점이나 가게에서 파는 상품은요 상품이 손상되거나 분실되면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습니다. 아이폰 부품이 고장나면 교체하면 되고요, 갤럭시 분실하면 다시 구입하면 되요. 상품은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어떻습니까? 자녀는 대체 불가 합니다.
(이야기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지난 1997년 4월 20일 의정부의 한 초등학교 주변에서 3살짜리 어린 아이가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여느 때처럼 집 앞에서 놀던 아이가 돌연 사라진 거에요. 사라진 아이의 이름은 김하늘 군 입니다. 당시 서른 일곱이었던 하늘 군의 어머니 정혜경씨는 어느 덧 시간이 흘러 60세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무려 23년이 지난 지금도 시계가 1997년 4월 20일에 멈추어 있습니다. 머리 속 온통 그 때 잃어버린 아들 생각 뿐 입니다. 아이를 잃어버린지 20년이 되던 해에도, “지금쯤이면 우리 하늘이가 이제 막 군대 제대했을 나이일 텐데…” 어머니는 연말연시 추운 겨울이 되면 아들이 더 자꾸 생생각이 난다고 합니다. 내 보고 싶은 아들 하늘이는 살아 있을까? 하늘이는 어디서 무엇을 먹고, 무슨 옷을 입고 지내고 있을까? 어머니는 20년도 더 전에 잃어버린 아들을 찾겠다는 기대감으로 20년을 살아왔다고, 아니 오직 그 하나의 소망으로 20년을 버텨왔다고 말했습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는 자책감에 우울증, 공황장애를 겪었고, 아이를 잃고 충격으로 약해진 몸으로 인해 목, 허리, 무릎 디스크 수술까지 했습니다. 어머니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아이를 찾는 노력을 쉬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스무살이 넘었을 하늘 군이지만,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3살 때 찍은 사진이 실린 전단지 돌립니다. 부모는 절대로 자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론. 하나님의 ‘은혜의 사슬’로 매어 있는 삶
우리는 은혜의 사슬로 주님께 매여 있는 사람들 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사슬이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보이지 않는 쇠줄에 묶여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진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어쩌면 오늘 이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 가운데서도 요나처럼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해본 분들, 방황하는 시간을 가진 분들 분명히 계실 거에요. “왜 하나님 제가 이렇게 살아야 해요?”, “왜요? 하나님 왜 제가 이거 해야 해요? 왜 제가 여기 있어야 해요? 하나님 저 이제 그만 놓아 주세요.” 이렇게 방황하는 분들 분명 계실 겁니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이 축복으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요나는 도망쳤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고 또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 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주님, 진실로 주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내 평생 나와 항상 함께 하실 터이니, 내가 주의 집에서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도망치고 계신 분들 있습니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계신 분 있으십니까? 빨리 주님께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어서 빨리 ‘니느웨’행으로 갈아타십시오.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에 가시고, 주님께서 머물라고 하시는 곳에 머무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매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