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6] (전체예배영상) 성경인물 시리즈 엘리야 (7) “세미한 음성 속 주어진 사명” (열왕기상 19장 8-14절)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은, 삶에 지치고 힘들어 하는 주의 자녀들을 돌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위로자 되시며 보호자 되십니다. 다윗은 시편 46편 1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말하며 인생의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오른편에 서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낮의 해도 밤의 달도 우리를 상치 못하도록 친히 우리의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시며 삶의 모든 재난과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1. 새 힘 주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지난 주 삶의 무게에 지치고 힘들어하며 영적 침체에 빠진 엘리야의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마음이 무겁고 육신이 지처버린 엘리야를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그가 마음 속 깊이 외로워하고 있으며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세요.
하나님은 로뎀 나무 아래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열왕기상 19장에 기록된 천사가 엘리야를 깨우는 장면을 보면, 천사가 얄미운 표정 지으며 발로 그의 궁둥이를 차거나, 주먹으로 옆구리를 툭 때리면서 깨우는 것이 아니었어요.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천사가 엘리야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는 모습을 그려 줍니다. 천사가 지쳐 쓰러져 있는 엘리야의 몸을 쓰다듬어 주며 위로해준 것이죠. “엘리야, 힘들지만 일어나서 어서 먹으렴.” 잠에서 깨어난 엘리야가 주위를 둘러보니 머리맡에 뜨거운 숯으로 구워 낸 빵 한 덩이와 물 한 병이 있습니다. 몹시도 지쳐 광야 한 가운데서 잠을 자다가 눈을 비비고 일어났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차려주신 밥상이 눈 앞에 놓여 있습니다. 엘리야가 얼마나 감동 했을까요? 이와 같이 우리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지친 영혼들을 질책하시지 않고 오히려 힘을 얻도록 도와 주십니다. “엘리야야. 일어나 먹어라. 네 갈 길이 아직 멀었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주신 빵을 먹고 물을 마시고 기운을 얻었습니다. 몹시도 피곤한 몸과 지친 마음으로 쓰러져 버린 엘리야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변함없이 그를 돌아보고 계셨고 그에게 쉼을 주시고 재충전할 수 있는 새 힘을 공급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힘을 얻은 엘리야는 사십 주야를 더 걸어가서 드디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하게 됩니다. 열왕기상 19장 8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왕상 19: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우리는 무엇인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시 넘어지곤 합니다. 그게 인간이고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소망은 무엇입니까? 지치고 힘들어 넘어져 있는 우리의 어깨를 토닥여 주시고, 힘들어 하는 우리를 쓰담아 주시고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누구든지 지칠 수 있습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쉼과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그를 쓰다듬어 주시고, 그를 위해 빵과 물을 친히 준비해 주시고 먹이신 하나님께서 지쳐버린 우리에게도 쉼과 힘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또 다시 남은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질문하시는 하나님

자, 호렙산에 도착 한 엘리야는 그곳에서 한 굴에 들어가 머물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또 다시 엘리야를 찾아오셨습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왕상 19:9)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따금씩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께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지금 이런 문제가 있는데, 주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나님 제 앞에 지금 선택지가 여러 개가 놓여 있는데 이 중에 내가 어느 길을 고르고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길입니까?”하고 물어보는 것처럼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질문들을 기도로 통해서 하나님께 물어보곤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우리만 질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질문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질문하시는 것을 경험해 본 적 있으십니까? 우리에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질문이야말로, 기도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 입니다.
성경 말씀을 살펴보면,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질문하신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이게 왜 신기한 장면이냐 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물음표를 던지시는 장면을 성경 가운데서 종종 보게 된다는 거에요. 얼마나 흥미롭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장면 중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던진 첫번째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가장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아담에게 하신 질문이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정말 아담이 어디 숨어 있는지 몰라서 그에게 물어 보신 것일까요? 마치 어린시절 동네 조그마한 골목이나 놀이터에서 숨바꼭질하고 놀던 아이들이 술래가 되어 숨어 있는 다른 아이들을 찾지 못할 때 “못 찾겠다 꾀꼬리”하고 외쳤던 것처럼, 온 우주의 주관자이시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아담을 보지 못해서 그를 찾고 계신 것일까요? 아니요.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그가 왜 숨어 있는지 그 이유까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어보셨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의도성을 갖고 물어보신 질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생활 속에서 ‘의도성 가진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자녀가 거짓말한 사실을 알고 있는 부모가 자녀를 훈계할 때 혹은 자녀를 시험하기 위해서 “너 지금 말하는 거 사실이야?”하고 물어볼 때 가 있습니다.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서 자녀의 정직을 교육하기 위해서 테스트하기 위한 질문인 것이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어보셨을 때, 그것은 단순히 육신적인 위치를 물어보신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있던 그 친밀한 관계가 왜 깨졌느냐’, ‘네가 어찌 지금 숨어 있느냐,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느냐’고 물어 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답을 몰라서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의도성을 가지고 물어 보십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세요. 몰라서 물어보신 것이 아닙니다. 이 밖에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질문은 전부 특별한 의도성이 있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은 “네 형제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어 보셨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이 아벨을 못 찾으셔서 물어보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전 안에서 기도하고 있는 이사야를 향하여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정말 몰라서 물어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문들 뒤에는 듣는 이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문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상고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열왕기상 19장 9절에도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던지신 또 하나의 질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세벨 여왕의 협박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쳐 내려온,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 선지자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질문하고 계십니다. 9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Elijah, what are you doing here?) “엘리야야, 너 여기서 뭐하고 있니?” 하나님이 물어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답을 몰라서 물어 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기 엘리야가 왜 있는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질문을 통해서 엘리야가 자신이 처한 영적 상황들을 스스로 돌아보게 만드셨고, 그러한 자기성찰을 통해 그의 영적 상태와 위치를 다시 한 번 점검 시켜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는 단계에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경험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주님의 음성이 질문의 형태로 우리 마음에 떠오릅니다. “너 그거 왜 구하니? 그게 너한태 왜 필요하니? 그게 나보다 더 중요하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시면 그 질문 앞에 우리는 벌거벗은 것처럼 노출 됩니다. 나는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내 안에 깊이 숨어 있는 잘못된 동기들과 탐심을 질문들로 깨닫게 하십니다.
어느 한 집사님이 이렇게 기도 했어요. “하나님, 제 비지니스 잘 되게 해 주세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하나님 영광 위해 살게 해주세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물어 보십니다. “내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돈이 없어서 사역을 못하는 하나님이냐? 너는 어찌 나중에 더 크게 성공하면 나를 섬기겠다고만 말하고 지금 내가 너에게 준 것들로는 나를 섬기지 않느냐? 지금 네가 가진 작은 것으로도 나를 위해 쓰지 않거늘, 네가 어찌 큰 것을 나를 위해 쓰겠느냐?”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질문을 통해서 우리 심부 깊은 곳에 숨겨진 마음의 동기와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야, 네가 왜 여기 있느냐?”는 질문을 통해 사역의 현장을 떠나 사명을 버리고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 엘리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10절 말씀 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왕상 19: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여기 말씀을 보면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란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어 원어 성경으로 보면 ‘질투하다’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어 기록 되어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다시 해석하면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질투하고 또 질투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질투심이란 어떤 감정이에요? ‘부부 사이나 사랑하는 이성 사이에서 상대방이 내가 아니라 다른 이성을 좋아할 경우에 느껴지는 시기심’ 그것이 바로 질투 입니다. 본문에서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 질투’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마치 마음 속에서 강한 질투가 일어나듯이 “저들이 하나님을 섬겨야지 왜 저렇게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지?”하고 ‘질투하고 또 질투하였다’는 고백 입니다. 엘리야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10절 말씀을 또 보세요.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는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고 외로운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여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공포감도 솔직하게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렸고, 주님의 제단을 파하였고, 하나님을 떠나 살아갔고, 심지어 여호와를 섬기는 모든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제는 나 하나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열심이 특심하여 하나님을 섬겼으나 내가 죽음의 위협을 느껴서 내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엘리야는요, 자기 나름 이 호렙산까지 도망쳐 올 근거가 있었습니다.
10절 말씀에 하나님께 대답하고 있는 엘리야의 목소리 톤이 어떠했을까요? ‘억울함’이 섞인 목소리였을 거에요. 엘리야는 하나님께 화도 나고 실망한 톤으로 기도하고 있었어요. 엘리야가 왜 화가 났어요? 자신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거든요. 그런데도 그가 처한 상황이나 환경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어요. 사실 엘리야는 450명 바알 선지자와 싸워서 승리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신앙으로 돌아올 줄 생각하고 크게 기대했어요. 어찌 그리 생각 안하겠습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단 위의 제물을 태웠습니다. 우리가 엘리야라도 그런 기대를 해 볼 수 있지 않았겠어요? “그래, 이제는 때가 되었지. 드디어 이 땅에도 변화가 찾아오겠구나!” 그러나 현실은 너무도 차가웠어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어요. 심지어 이제는 이방신을 섬기는 이세벨 여왕이 앞서서 엘리야를 죽여버리겠다고 선포하고 군사들을 보냈어요.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 되었어요. 그러니까 10절에서 엘리야의 목소리는 하나님을 향한 실망감, 분노, 그리고 열심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바뀌지 않는 이스라엘의 암울한 영적 현실에 대한 억울함도 섞여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 정말 할 만큼 했어요! 이 정도 되었으면 나 좀 도와주셔야죠!”
우리들도 얼마든지 엘리야처럼 인생이 내가 생각한대로 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엘리야처럼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다고 하나님께 하소연 할 때가 있어요. 사실 자신이 계획한대로 인생이 흘러가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나는 나름대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내 인생은 한 발작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거에요. 아니 남들은 다 일도 잘 풀리고, 부해지고 높은 직책 올라가는 것 같은데, 나만 건강도 않 좋아 지고, 가정 형편도 썩 나아질 기미가 없고, 1단에서 기어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너무 천천히 흘러가는 자신이 인생이 너무나도 답답한 거죠. 엘리야는 속에서부터 화가 났습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 이정도 열심히 했으면, 그의 삶이 자신이 그려온 청사진처럼 되었어야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에요. 이러한 근거를 가지고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신이 사역의 현장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사명을 저버릴 수 밖에 없다고 변호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이 장면을 다시 보면 지금 엘리야가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 저 정말 남보다 열심이 특심하게 살아 왔거든요? 그러면 제 인생은 이러이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은 이러이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엘리야는 자신의 전제 대로 상황이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과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비록 지금 내 삶이 남들에 비해 더디게 흘러 가는 것 같아 보이고, 비록 지금 내 삶이 내가 꿈꾸고 원하던 모습이 아닐지라도, 현재 우리가 있는 그곳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곳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3. 세미한 소리로 찾아오신 하나님

엘리야의 원망 섞인 기도를 잠잠히 듣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1-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왕상 19: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왕상 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왕상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1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엘리야 앞에 지나가십니다. 지금 엘리야는 동굴 안에 있고, 하나님이 그가 계신 곳을 지나가십니다. 하나님이 지나실 때 나타난 첫 번째 현상은 크고 강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바위를 부수었습니다. 바람이 부슬 정도면 얼마나 강력한 바람이었겠습니까? 이 바람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 다음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지진 가운에도 하나님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지진 다음에 셋째로 불이 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은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으려고요,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기 위해서 북을 치고, 장구를 치고, 꽹과리를 치고, 수 천명이 함께 모여 집회하는 장소를 찾아갑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공간에도 거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골방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그곳에서 “하나님”하고 간절하게 부를 때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실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불과 같은, 바람 같은, 지진 같은 큰 현상을 사람들은 사모할 때가 많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이 은밀하고, 고요한 공간에 계실 때가 더 많습니다.
12절 말씀에 보니까, 불이 지나간 후에 무엇이 있습니까? 세미한 소리… 이 표현을 영어로 보면 “a gentle whisper” 입니다. 이 말을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음성이 없는 소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침묵의 소리” 이해가 되십니까? 말 자체가 모순적이죠? ‘소리가 없는 소리…’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이것을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생각하면 이것은 참 적절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제가 지금 Mic를 사용해서 여러분에게 전달되는 것처럼 공기의 진동을 통해서 전파되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부를 때처럼 “아무개야, 아무개야”하고 들리는 육성이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a gentle whisper”로 우리의 영혼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a gentle whisper” 그 세미한 소리가 엘리야에게 들렸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한 가지 특별한 구조가 나옵니다. 9-10절 13-14절이 동일합니다. 말씀이 반복 됩니다. 앞서 9-10절에서 하나님께서 질문하시고 엘리야가 답했죠? 13-14절에 글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 같은 말씀이 다시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똑같이 두 번째 물으셨습니다. 왜 우리 하나님이 두 번째 이렇게 물어 보셨을까요? 우리 하나님이 귀가 어두워서, 보청기를 꺼 놓으셔서 못 들으셔서 다시 물어 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9-10절 이후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장엄하심과, 주님의 임재를 강력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님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엘리야가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전제와 고정관념이 깨졌는지 확인하시기 위해서 다시 한 번 그에게 묻고 계십니다. “엘리야야 너가 여기 있는 이유가 정말 나의 잘못 때문이더냐?”
9절에 물어보신 질문을 또 다시 물어보신 이유는 안타깝게도 엘리야는 영적 탈진과 육신의 연약함과 마음의 지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사역을 오래 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처럼 지칠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열왕기상 19장 이후로 엘리야의 사역은 마무리되고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엘리야는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면서도요 주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왜 여기 있느냐?”는 하나님의 의도를 엘리야가 파악하지 못한 것이죠. 그는 분명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분명 마른 하늘에서 불을 내렸고, 가뭄 중에 하늘에서 비를 내릴만큼 대단한 선지자 중의 선지자 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었어요.
성도의 삶 가운데 가장 주의 할 것 중 하나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교회에서 무언가 대단한 프로젝트를 하고, 큰 사역을 하는 것이 중요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신앙생활 할 때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에 성경을 10장도 읽을 수 있고, 20장도 읽을 수 있습니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큼 평생 성경을 많이 읽으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러나 성경을 통해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성경 읽기의 참 된 유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파악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한 신앙생활이야말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 입니다. 지난 한 주 말씀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오늘 성경을 읽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습관처럼 읽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말씀 가운데 주어지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계십니까? 말씀을 볼 때 대충 보지 마시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들려 주시고자 하는지를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받은 말씀대로 살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과 같이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 진하게 만나고, 주님의 음성을 더욱 더 분명하게 을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직접 성경을 펼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 그 세미한 음성 “a gentle whisper”를 들을 때야말로 진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입니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 우리는 늘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말씀을 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귀한 말씀입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의 갈 길을 인도해주시는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 세미한 음성을 듣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말미암아, 주님이 원하시는 그 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더 나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