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9] (전체예배영상) 성경인물 시리즈 엘리야 (6) “지친 그대여 일어나 먹어라” (열왕기상 19장 1-8절)

서론. 불안감과 우울증을 호소하는 세상
현재 우리 모두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전세계가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음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 일상의 많은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못합니다.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채, 집에서 컴퓨터로 수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가족들도 서로 방문하지 못하고 전화로만 서로 안부를 묻고 있는 실정 입니다. 요양원에 계시는 노부모를 찾아가 뵈려면 유리창 밖에서 봐야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가족을 면회하려 해도, 1인 이상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면회 자체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경우 모든 예배가 잠정적으로 중단이 되었고, 이렇게 주일예배도 현장예배가 아닌 영상예배로 전환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우리의 일상이 코로나19로 인하여 크게 변화하고 만 것이죠. 그로 인해 나타난 사회적 부작용도 심각합니다.
지난달 3월 13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비상사태를 선포한 이후, 미국에서는 가정 폭력이 증가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직장을 잃은 분들도 있습니다. 가정 경제에 어려움이 찾아와 휘청거리자, 스트레스를 받고 심리적으로 예민해지는 시기 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부부가 혹은 부모와 자녀가 한 공간에서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까, 서로 더 자주 충돌하게 되고 가족끼리 다투는 일이 많아지게 된 것이죠. 스트레스를 받은 가장들이 집안에서 자신의 가족을 대상으로 ‘분풀이’하며 트러블을 겪고 있는 케이스가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신문을 보니까 코로나로 인해 미국 봉쇄령 이후 가정폭력으로 인해 이혼율 또한 눈에 뛰게 증가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회적 현상을 일명 이를 ‘코로나 이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시카고 노스웨스턴 의대의 한 교수는 인터뷰에서 “병원 응급실에서 가정 폭력의 결과를 직접 느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엄청난 스트레스가 가정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미국은 자살률이 눈에 뛰게 높아졌습니다. 지난 4월 2일 시카고 인근의 한 도시에 살고 있는 한 50대 부부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들은 코로나로 인해 앞으로 살아갈 것에 대해 가족들에게 두려움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보다 앞선 3월 31일에도 코로나19로 인해 직장을 잃은 한 30대 남성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사랑하는 가족들을 갑작스런 죽음으로 떠나 보낸 후 가슴 아파하는 유가족들도 많이 있습니다. 혹 주변 이웃 가운데 코로나19 확진 판정 받았음에도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고 있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코로나19에 감염된 것은 아닌지 염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현재 미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불안감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1. 엘리야에게 찾아온 영적 침체
오늘 우리가 살펴본 분문에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현상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엘리야 입니다. 엘리야는 매우 지쳐 있습니다. 더 이상 살아갈 의욕도 없고, 좌절감에 빠져 있습니다. 더 이상 앞으로 걸어갈 힘도 없어 로뎀 나무 아래 지쳐 쓰러져 있습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다면 ‘죽는 것’, 단지 그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러한 엘리야의 모습은 우리가 그 동안 알던 용맹스럽던 엘리야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 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기에 그토록 위대해 보이기만 했던 엘리야가 이런 심각한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영적 침체에 빠진 엘리야의 탄식과 그의 기도하는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엘리야의 모습을 보며, 한 가지 사실을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평상시 신앙이 좋은 분도요, 심각한 병에 걸리면 얼마든지 힘들어 하고 우울해 질 수 있어요. 평상시 믿음이 좋은 분도요, 코로나19로 인해 사업이 힘들고 어려워지면 얼마든지 심한 스트레스를 겪으며 한숨 쉬고, 불안해 할 수 있어요. 왜요? 사람은 누구나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 입니다. 인생의 시련 앞에 어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파해도 괜찮습니다. 때로는 힘들면 눈물 흘려도 괜찮습니다. 세상에 비에 맞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또 어디 있습니까?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누구라도 인생에 고난이 찾아오면 마음이 흔들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나기 마련 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엘리야와 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나와 같이 똑같은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동병상련의 큰 위로가 되었어요.
엘리야가 어떤 사람 입니까? 기도를 통해 죽은 아들을 살린 엘리야, 하늘에서 불을 내린 엘리야, 3년 반 동안 가뭄이 찾아온 이스라엘에 비를 내린 엘리야. 그야말로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며, 영적인 거인입니다. 그런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으며 침체에 빠지고 혹독한 우울증을 경험했다면, 저와 여러분도, 사람은 그 누구라도 얼마든지 이런 영적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왕상 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길고 긴 사역에 엘리야는 지쳐 버렸어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의욕을 상실했고, 그는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습니다. 깊은 영적 침체에 빠져 버린 것이죠. 엘리야가 마음이 얼마나 힘들면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하고 하나님께 기도 했을까요? “하나님, 저 살만큼 살았어요. 이제 충분합니다. 그러니까 저 이만큼만 살겠습니다. 저 이제 데리고 가십시오.” 깊은 고통 속에서 터져 나온 엘리야의 탄식이 느껴지십니까?
오늘 영상으로 예배 드리는 우리 성도님 가운데, 혹시 엘리야와 같은 마음으로 이 설교를 듣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괴롭고 너무 힘든 분들도 분명 계실 거에요. 외롭고, 또 괴로운데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는 분들도 계실 거에요. 대부분의 질병들도 다 그렇습니다만, 영적 침체라는 것도요. 뭔가 예고를 하고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 영적 침체와 우울증을 겪고 있는 거에요.
예전에만 해도요, 교회에서 일하는 목회자가 힘들어도 힘들다는 표현을 잘하지 못했어요.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이다’고 판단해 버렸어요. 죽고 싶어도 죽고 싶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었어요. 목회자가 우울증에 빠졌다고 누군가에게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우울증에 걸려도, 사람들 시선을 피해서 서 꼭꼭 숨어서 성도들 몰래 병원 가서 상담 받고 치료 받곤 했어요. 그게 어찌 목회자만 그러겠어요?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서도 분명 가슴에 멍이 들도록 아픈 마음인데 말 못하고 눈물 삼키며 살아가는 분들도 계실 거에요. 너무 삶이 힘들고 어려운데, 남들 앞에서는 아무일 없는 듯 사람 좋은 웃음 보이며 하루 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분들도 계실 거에요.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자식들에게도 말하지 못해서 나 혼자 끙끙 앓고 계신 분들도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몹시도 지치고 힘든 날에는 누군가에게 위로 받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지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격려와 위로로 새 힘을 얻고 용기를 얻습니다. 매우 힘들게 일하고 지치고 무거운 어깨를 간신이 이끌고 퇴근하여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의 건내는 따뜻한 한 마디가 남편에게는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됩니까? 또한 힘들게 일하고 온 아내를 향해 남편이 “오늘 하루 별 일 없었어?”하고 사랑과 관심을 갖고 물어봐 주는 이 한마디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시작점이 됩니다. 연약한 인간은 서로에게 위로를 주고 받으며 살아갈 때 마음에 진정한 쉼과 평안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이 너무도 힘들고 무거운 날,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때 인간은 깊은 외로움과 쓸쓸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보 오늘 이런 일이 있어서 너무 힘들었어…” 그럴 때 “아이고… 그런 일이 있었어..? 당신 오늘 하루 정말 힘들었겠다…” 이런 공감의 말 한 마디가 큰 힘을 주죠… 그러나 반대로 오늘 본문 속 엘리야는 혼자였어요. 누가 엘리야의 이야기를 들어 주겠어요?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가장 큰 아픔은, 힘들 때 찾아가서 내 마음의 보따리를 풀어놓고 마음껏 이야기할 대상이 없다는 거에요.
성경을 자세히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다 이런 영적 침체를 겪었어요. 오늘 본문의 주인공 엘리야도, 다윗도, 모세도, 요나 선지자도 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한 번 즈음은 하나님께 “나 죽여주십시오.”하고 기도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이런 영적 거인들도 인생의 문제로 고통 받았다면 우리들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지쳐 쓰러져 있었던 이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던 것처럼, 지쳐 있는 우리들의 삶도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키실 수 있음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2. 영적 침체의 원인: ‘두려움’(염려)
사람마다 기질이 다릅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서 왜 영적 침체가 일어났는지를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가 겪고 있는 아픔을 자세히 살피다 보면, 우리의 삶과 어느 정도 비슷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문학작품이나 영화, TV 드라마 보면서 힐링을 경험하기도 하는 거에요. “저 드라마 주인공이 경험하고 있는 저 아픔은 내가 겪은 아픔과 비슷한데?” 비록 브라운관 속 가상의 인물일지라도, 저 사람이 어떻게 삶의 고통을 이겨 나가는지 그 모습을 관찰해 나감으로써 자신의 삶 속 아픔을 이겨내 나가는 지혜를 배워가는 것이죠. 동일한 의미로 오늘 본문 속 기록된 영적 침체에 빠진 엘리야의 삶을 관찰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분명 유익이 있습니다.
먼저 엘리야의 경우, 왜 영적 침체가 찾아왔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말씀을 보니, 이스라엘의 여왕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 했습니다. 열왕기상 1-2절 말씀 입니다. “(왕상 19:1)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왕상 19:2)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여러분, 한 번 머리 속으로 상상을 해 보세요. 어느 날 우리 집 우체통에 편지 한 통이 도착 했어요. 편지를 열어 보니까 내 사진이 한 장 들어가 있는데 양쪽 눈이 다 파져 있어요. 목에 붉은 피로 선을 그어 났어요. 누가 보낸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집 밖에 나오면 죽여버리겠다고 써 있습니다. 이 편지 받고 “뭐야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쳤어?” 하고 쉽게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마음 편하게 밖에 나갈 수 있을까요?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고 식칼을 들고 우리 집 밖에 서 있다고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어디 두려워서 밖에 나가겠습니까? 당장 911에 신고 해야죠. 창 밖을 유심히 보고, 의심 가는 이상한 행인은 없는지 잘 살펴 봐야죠. 밤에 자기 전에 현관문은 잘 잠겼는지, 창문은 열린 것은 없는지 확인해 보지 않겠어요? 이 마음이 뭡니까? 두려움과 염려 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거에요. 죽음이 두려워서 도망치고 있습니다. 3절 말씀 보세요. “(왕상 19:3)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3절 말씀 보니까 엘리야가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엘리야도 인간인데 이세벨 여왕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니까 왜 안 두려웠겠어요? 용맹스럽던 엘리야도, 이세벨이 두려워 도망한 거죠. 우리 삶에 찾아오는 두려움은 영적 침체와 함께 찾아오는 현상 입니다.
요즘 들어서 급격하게 증가하는 정신질환 증 하나가 ‘공황장애’(Panic disorder) 입니다. 공황장애를 겪는 분들에게는 ‘공황발작’(panic attack) 이란 현상이 찾아오는데요. 이게 뭐냐 하면 일상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극도의 공포심’(sudden intense fear)이 공격하듯이 찾아오는 거에요.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차고, 온 몸에 땀이 나고, 당장 죽을 것 같은 불안 증상 입니다. 그 순간을 못 이겨내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거에요. 두려움이란 것이 사람을 얼마만큼 망가트릴 수 있냐 하면, 공황장애가 심하면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영적 침체에 빠지면 그 두려움이 조절이 안되는 거에요. 그냥 죽고 싶은 거에요.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세요. 엘리야가 가다가 자기 사환을 브엘세바에 머물게 하고 자기 홀로 길을 떠납니다. 여태까지 엘리야는 한 번도 사환 없이 길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기 사환을 브엘세바에 머물게 하고 혼자 광야로 들어가 버렸어요. 아무도 자기를 찾아오지 못하도록 세상과 단절해 버린 거에요. 사람이 싫은 거에요. 누구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죠. 영적 침체가 찾아온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지금 사람이 싫은 거에요. 혼자 있고 싶어서 더 깊은 광야로 하룻길 즈음 더 들어갔어요.
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왕상 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 앉은 엘리야, 그의 간절한 소원은 “죽고 싶다” 였습니다. 사는 게 너무 짐스럽다는 거에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거죠. 성도 여러분, 우리가 꼭 한 가지 알아야할 것이 있어요. 세상에 정말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엘리야가 “하나님 나 죽고 싶어요.”하고 말한 것은 사실은… “하나님 저 살고 싶어요.”하는 외침이나 다름이 없어요. 나도 너무나 살고 싶은데,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거에요. 더 이상 못 버티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거나, 내가 처한 상황을 바꾸어 주시든지 아니면 나를 죽여달라고 애절하게 처절하게 기도하고 있는 거에요. 여러분 혹시 주변에 엘리야처럼 “나 죽고 싶다”하는 분 계시면, 저 분이 정말 죽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얼마나 마음이 괴로우면 저렇게 말할까 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영적 침체를 치료하시는 하나님
겉으로는 “나 죽여주세요!”하고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살고 싶어했던 이런 엘리야의 마음.. 그런 그의 마음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지쳐 쓰러진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5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왕상 19:5)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엘리야는 여태까지 쉼 없이 달려왔어요. 많은 힘을 쏟았어요. 그가 하늘에서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할 때는 무려 일곱 번이나 쉼 없이 기도 했습니다. 엘리야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 했겠습니까? 말 그대로 기도에 혼신의 힘을 쏟았을 거에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몸이 피곤하면 더 쉽게 짜증도 나고 화도 납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는 충분히 잠을 자는게 도움이 됩니다. 피곤하고 마음이 힘들 때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 맛있는 음식 먹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있어요. 육체적인 피곤함이 영적 침체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쉬는 것도 영적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천사가 어떻게 했습니까? 지쳐서 누워 자고 있는 엘리야의 궁둥이를 발로 빵 차면서 “야 일어나! 엘리야 너 겨우 이거 밖에 안 되니? 나 너한태 엄청 실망했다.” 천사가 엘리야를 보고 이렇게 호통 쳤습니까? 아니에요. 5절 말씀 다시 보세요. “(왕상 19:5)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천사가 엘리야를 깨우는 장면은 마치 사랑 많은 어머니가 열병에 걸려 아파하는 아들을 깨우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아들 일어나야지. 힘들어도 일어나 봐. 아파서 이것만 먹고 또 자. 이거 먹어야 몸도 빨리 낫지.” 이렇게 아픈 아들을 타이르는 자상한 어머니처럼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집니다. “엘리야, 일어나야지. 일어나서 먹어” 엘리야가 일어나 보니까 자기 머리맡에 뭐가 있어요? 6절 말씀을 봅시다. “(왕상 19: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만일 제가 엘리야라면 이 대목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을 거 같아요.
여러분은 미국에서 살면서 한국을 생각하면 가장 그리운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미국에 와서 가장 그리운 것 중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입니다. 저도 제가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상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어요. 왜냐하면 사실 저희 어머니가 음식 솜씨가 그렇게 뛰어난 분은 아니세요. 그래서 어린 시절 한국에서 부모 밑에서 함께 살 때는 늘 기회가 있으면 밖에서 사 맛있는 것 사 먹자고 졸라 대고 그랬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상업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파는 밥’이 있고요, ‘정든 밥’이 있더라고요. 시간이 갈수록 밥에서 돈 주고 사먹는 밥이 아무리 맛있어도, 가정에서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차려주신 밥만치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밥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정이 깃들어 있거든요. 시간이 흘러갈수록 누군가 나를 위해서 밥상을 차려준다는 것은 얼마나 감동적인 것인지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오늘 엘리야는 누가 차려준 밥상에 앉아 있습니까? 천사가 차려준 밥상이에요. 천사는 누구를 대신해서 왔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그럼 이 밥상은 사실상 누가 차려주신 거에요? 하나님이 엘리야 먹으라고 차려주신 거에요. 하나님의 정이 든 밥상입니다. 메뉴를 좀 볼까요? 숯불에 구운 빵, 한 병 물 입니다. 하나님이 차려주신 밥상 치고는 너무 허술해 보입니까? 그러나 이 날 엘리야가 먹은 빵 맛을 어찌 잊겠습니까? 남자 분들 군대에서 생활할 때 훈련 중에 반합에다가 끓여 먹은 라면 맛 기억나십니까? 그거 절대로 못 잊습니다. 왜요? 고생할 때 먹은 밥은 절대 못 잊어요. 세상에 그 보다 더 맛있는 라면은 없어요. 비록 빵 한 조각 물 한 병이었으나, 엘리야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깃들어 있는 밥인데 세상에 이 보다 더 훌륭한 밥상이 어디 있겠어요? 제가 엘리야였다면 이거 보고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을 거 같아요.
엘리야도 바로 먹지 못하고 잠시 주저한 것 같아요. 오늘 본문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상상해서 본다면 어쩌면 이 순간 엘리야도 많은 생각이 들었을 거에요. “야, 나는 더 이상 선지자 노릇 못해 먹겠다고 이렇게 광야로 멀리 도망쳐 왔는데. 하나님은 그런 나를 위해 밥상을 차려 주셨구나…” 이 때 또 다시 천사가 또 다시 엘리야에게 나타납니다. 7절 말씀 읽겠습니다. “(왕상 19:7)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하나님께서 주님의 자녀들을 대하시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 가득하고 부드럽습니까? 우리 하나님은요, 주님의 자녀들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그냥 멀리서 바라만 보고 계신 분이 아니세요. 주님은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 주시길 원하시고, 우리의 몸과 영혼이 회복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세요.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시편 23편 4-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23편 5절에서 다윗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 베푸셨다”고 했을 때 이 상은 우리가 달리기 시합에 나가서 우승하면 받는 ‘상’(prize)가 아니라, 바로 ‘밥상’(table)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자녀들이 힘을 얻도록 위로하시기 위해 직접 상을 차려 주시는 자상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다고 내치시는 분이 아니세요.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감싸 안으시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 이십니다.
자, 이 놀라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엘리야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8절 입니다 “(왕상 19: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빵을 먹고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힘을 내어 사십 번의 밤과 사십 번의 낮을 지나는 동안 걸어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그가 자신이 처한 영적 침체 곧 두려움과 우울증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길을 걸어갔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따금씩 인생이 우리에게 돌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가 차가운 돌 남는 것이 아니라, 향기로운 꽃으로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인생의 돌을 대신 맞기 위해 그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벼랑 끝에 홀로 피어있는 꽃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힘든 시간 입니다. 어려운 때 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분명 이 어려움을 주님의 보살피심과 보호하심을 통해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내십시오. 지금도 살아계신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삶에 지친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베푸신 삶의 놀라운 은혜의 밥상을 먹고,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