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4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요한계시록 14장 6-13절)

요한계시록 14장 6-7절에 첫 번째 천사가 등장합니다. 그가 전하는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세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둘째, 영광을 돌리라. 그리고 셋째, 그분을 경배하라. 이것이 영원한 복음이라고 합니다. 마지막까지도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더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이토록 오시지 않을까… 2천 년이나 지났는데 오셔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한 사람이라도 더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심판을 Delay 하고 계신 것이죠.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둬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 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여기서 우리가 먼저 풀어야 할 것은 “큰 성 바벨론”이라는 나라의 정체입니다. 큰 성 바벨론은 당시 로마제국을 상징합니다. 물론 이 바벨론도 구약의 역사에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바벨론과 로마제국이 갖는 특별한 하나의 공통점은 예루살램 성전을 파괴한 장본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제국이 갖는 압축적인 의미는 성도들을 압제하고, 성도들에게 고난을 주는 가해자의 대명사입니다.
바벨론은 사탄을 섬기는 세상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손과 이마에 666의 표를 받게 한 제국… 우상이나 황제를 경배하게 한 제국… 만일 숭배하지 않으면 생명을 위협하고 생계를 끊어버리는 나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핍박과 유혹 속에서 사람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영적인 음행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큰 성 바벨론 은 그 당시의 로마제국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그 당시의 문학에서 자주 사용하던 표현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큰 성 바벨론”이란 이 세상의 ‘권력’과 맘몬, 즉 돈의 위력을 말합니다. 지금 세상은 그런 가치와 사고에 매혹되어 이미 잠식 당해 있습니다. 보이는 문화, 느끼는 문화, 돈의 위력에 모두가 빠져 있습니다.
8절을 보니, 둘째 천사가 이 바벨론을 향하여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하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지나간 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될 일들을 계시의 방법으로 설명하는 책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말이 미래시제로 나와야 합니다. 정확한 맥락이라면 “무너질 것이다 무너질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는 과거시제로 그 것도 두 번이나 표현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메시지를 드러내고 강조 하기 위해 사용한 문학기법 중 하나입니다. 미래에 이루어 질 일이 너무 분명하고 확실하다면, 과거동사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상대방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넌 이미 죽었어.’’라 고 하면 “너 확실히 죽는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듯 이 세상이 궁극적으로 패망할 것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두 번이나 과거 시제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셋째 천사로 넘어갑니다.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 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계 14:9〜11)
첫째로 등장한 영원한 복음을 가진 천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분을 경배하라 심판의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며 온 우주적 운명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승리와 완성으로 결말 날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천사가 이 세상에 모든 심판 당해야 될 대상들이 패망 할 모습을 반드시 될 일이라고 매우 확정적으로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등장하는 천사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사람들이 마지막에 어떤 고난 속에 있는가를 아주 실재적으로 보여줍니다. 꺼지지 않는 유황불 속에서 고난을 받는데,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 갑니 다.
요한계시록 14 장 1절에서 시온 산에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사만 사천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의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과 정반대로 9〜11절에서는 어린 양의 피의 공로를 힘입지 않고 끝까지 이를 거역하던 무리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상반된 그림을 보여주는 뚜렷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에 만나는 최종적인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말을 보지 못하고 싸웁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말을 미리 알고 싸우는 것입니다 어느 쪽을 선택할까 하는 싸움도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운명적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 입니다. 그래서 그 싸움에서는 절대 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결말을 보고 간다는 것은 우리 가 이 전쟁의 승부를 아는 것입니다. 승부를 미리 알면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끊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2)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님을 충실히 믿는 성도들은 이런 때 인내가 필요하다.’
(계 14:13 상반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13절 상반절을 보니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체 글을 받아 적고 있는 상황입니다. 듣고 있기만 한 것도, 어떤 보여 주시는 환상을 보고 있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열심히 받아 적고 있습니다.
받아 적는 사람한테 왜 “기록하라”고 재차 강조를 하겠습니까? 꼼꼼하게 살펴보니 이 표현이 요한계시록 전체에 12번 등장합니다. 이 표현이 사용될 때마다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기록하라’’는 말은 극적인 장면의 전환을 앞둘 때나 새로운 국면에 들어설 때 집중하게 하 는 의도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는데 상대방이 듣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보다 더 중요할 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 잘 들어!”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그 극적인 장면의 전환과 혹은 그 내용이 매우 강조 되어야 될 만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말인데, 그 내용이 바로 등장을 합니다. 
첫째,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 14:13) 기독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복 되다고 말 하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만이 죽은 자들 앞에서 부르는 찬송이 있 습니다. 그렇다면 왜 죽은 자들을 복 되다고 했을까요? 첫째는 죄 문제가 해결되었고, 둘째는 부활의 약속과 함께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이미 우리도 그 자리에 같이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순간, 우리 죄는 일순간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연약함 가운데 놓여 있다 할지라도 이제는 죄 문제로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그분 이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만큼 죽음의 문제에 관해서 소망과 확신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살면 살아서 할 일이 있고, 죽으면 죽어서 갈 곳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의 문제를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의 경계선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수고를 그치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의 하반절 내용을 살펴봅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셋째, 수고와 충성에 대한 보상과 대가가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 14:13) 이 땅에서 주님을 붙잡고, 주님께 집중하고, 주님 안에서 머물며 살았던 눈물과 수고와 충성에 대한 보상과 대가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14장 13절을 통해서 아주 중요하지만, 보편적인 약속 진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이고, 그 복의 의미를 두 가지 차원에서 이 해했습니다. 둘째는 십자가 안에서 우리의 수고가 그칠 것이며, 이 십자가 안에서만 우리에게 온전한 쉼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주님 앞에 충성 했던 모든 것들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세 가지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따르는 결론은, 결국 공정하고 객관적인 삶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 들의 삶은 절대 공정하거나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평생 동안 무조건 하나님 편을 들다 주님이 오라 하실 때 가는 것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눈치를 너무 볼 필요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