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7 피할 길을 내주시는 하나님 (요한계시록 12장 1-6절)

요한계시록 12장은 이적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적’하면 앉은뱅이가 걷고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적은 이런 기적과는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적은 Miracle 이라 보다는 영어로 ‘Sign’에 해당합니다. 즉 ‘기적’이 아니라 ‘표적’입니다. 어떤 사건을 더 자세히 알리기 위한 일종의 표지판입니다.
여태까지 요한계시록은 수많은 재앙들과 심판을 기록하며 독자들의 마음이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가운데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요한계시록 12장이 이 책의 진정한 목적지를 안내하는 표지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과연 말씀이 보여주고 있는 표지는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상징들로 가득합니다.
먼저 1절에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녀의 특징은 해를 입고 있습니다.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습니다. 이 여자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바로 교회 입니다. 이 교회가 해, the Sun, 을 옷처럼 입고 있다는 것, 그 발 아래 달이 있다는 것, 그 머리에 열 두 별을 썼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에서 등장하는 요셉이 꾼 꿈을 보면 그의 아버지 야곱을 해로, 어머니를 달로, 자신의 형제들을 별로 비유합니다. 학자들은 성경의 첫번째 책인 창세기와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이야기가 데칼코마니처럼 등장하는 것으로 봅니다. 즉 1절에 등장하는 해와 달과 별은 단순히 신약시대의 초대교회가 아니라, 구약시대 때부터 이어져 온 모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2절 말씀을 보니, “여자가 아이를 임신하고 해산할 때가 돼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었습니다.” 여자가 해산할 때 당하는 진통과 괴로움이란 것은 교회가 가장 극심한 고통을 당하던 때를 상징합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나라를 빼앗기고 로마의 속국으로 살아가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져버린 신구약 중간기, 영적 암흑기를 상징합니다. 물론 여인이 당하는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은 아기가 태어나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여인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만큼 커다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직전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그런 고통의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서 잠시 카메라 장면을 옮깁니다. 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12: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해를 입은 여자를 비춰주던 카메라는 갑자기 한 마리의 큰 붉은 용을 보여줍니다. 이 두 가지 이적들은 서로 연결되게 됩니다. 마치 전쟁영화에서 두 등장인물이 서로 만날 때 양쪽 진영을 먼저 보여주듯이, 먼저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를 보여주고 이제 카메라가 붉은 용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용’이란 이 단어가 헬라어에는 ‘드라콘’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의 Dragon 이 여기서 나온거죠. 그럼 이 큰 붉은 용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바로 사탄입니다. 3절에 기록된 사단의 특징은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고 일곱 면류관이 있습니다. 머리가 일곱이란 것은 사탄의 지혜가 뛰어나고 뿔이 열이라는 것은 힘이 거대하며, 일곱 면류관이란 것은 권세가 큰 존재임을 상징합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며 내게 절하면 이 세상을 다 준다고 말합니다. 즉 그가 가진 힘과 권세를 넘겨준다고 유혹한 것이죠. 물론 그가 지닌 힘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아주 잠시 뿐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렇게 예수님을 유혹할 만큼 큰 힘과 권세를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본문에 그의 열 뿔과, 일곱 면류관이 그러한 사탄의 힘과 권세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가 쓴 면류관은 예수님이나 본문 1절에 등장하는 여자 곧 교회가 쓴 면류관과 다른 면류관입니다. 그리스도나 여자가 쓴 면류관은 헬라어 원어로 ‘스테파노스’ 입니다. 이것은 최종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그러나 본문 3절에 나타나는 용이 쓴 면류관은 헬라어로 ‘디아데마’ 입니다. 이것은 권력으로 찬탈한, 명분이 없는 권위를 상징합니다. 즉 사단이 가진 권세는 잠시 있다 사라질 아침 안개와도 같은 권세 입니다.
자,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붉은 용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집니다. 어떤 이들은 이 별 삼분의 일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보기도 하고, 사단과 함께 타락한 천사 1/3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사탄이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죠, 4절 말씀을 보니, 이 용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앞서 우리가 살펴 본 그 여자,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려고 합니다. 즉 그 아이를 죽이려고 하는 거죠.
아니 도대체 그 아이가 누구이길래 이렇게 사탄이 그 아이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걸까요? 이 아이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5절을 봐야 합니다. (12: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여기서 쓰인 ‘철장’이란 단어는 고대 왕들이 손에 쥐고 있는 단단한 쇠로 만든 지팡이 입니다. 오늘 날에도 영국의 여왕이나 유럽의 국왕들의 초상화를 보면 이들의 손에 철장이 들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철장은 강력한 왕권을 상징합니다. 이 철장이란 단어가 시편 2편에 쓰인적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시입니다. 시편 2편을 보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시편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는 시였습니다.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될 아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지금 큰 붉은 용, 사탄이 이 예수의 탄생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나자마자 그를 삼키려고 곧 그를 죽이려고 벼루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당시 유대 왕이었던 헤롯 왕은 자신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에게 예수를 죽이기 위해 출생지를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일에 실패하자 또 다시 헤롯 왕은 베들레헴 지역 두 살 이하의 모든 어린 아기를 죽여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꿈에 나타나 그가 애굽으로 도피하여 살아남습니다. 결국 아기를 죽이려했던 붉은 용의 계획이 실패합니다. 5절 말씀 후반절을 보니까 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갑니다.” 물론 태어나자마자 바로 올라가시지 않고, 이 땅에서 33년간 살아가시고,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고 제자들도 양육하신 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또한 부활하시고 승천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이 짧은 멘트를 통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승리를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승천은 예수님의 승리에 대한 표현입니다. 사단이 세운 계획이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아무리 큰 붉은 용이 일곱 머리에서 나오는 지혜를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지혜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그가 힘과 권세를 상징하는 일곱 면류관을 쓰고 있어도 사단은 결코 하나님의 힘과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사단의 계획은 언제나 실패하게 되고 결국에는 망하게 됩니다.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2: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아이를 낳은 여자는 이제 용을 피해 도망합니다. 그가 도망친 곳은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시기 위해 예비하신 광야였습니다. 우리는 앞서 이 여자는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교회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광야에 몇 일 동안 피해 있습니까? 1,260일 동안 입니다. 혹시 1,260일이 어떤 기간을 상징하는지 기억나네요? 우리는 어제 새벽에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며 배웠습니다. 1,260일은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마지막 시대를 상징합니다. 자 그럼 잠시 복습을 하겠습니다. 유대인의 한 달은 정확히 30일이라고 했죠? 1,260일은 몇 달입니까? 마흔 두 달입니다. 년으로 하면요? 삼년 반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1,260일, 마흔 두 달, 삼년 반, 한 때 두 때 반 때 이렇게 표현한 것은 사실 다 같은 기간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 1,260일동안 즉 예수님께서 다시 돌아오시는 그 마지막 때까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광야에서 돌보심을 받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왜 하필이면 광야일까요? 이왕에 돌봐주실 거면, 왕궁이나 좋은 대궐 같은 저택에서 보호해주시지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당신의 백성을 양육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광야란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무엇 하나 생산 해 낼 수 없는 곳입니다. 온 통 사방의 땅이 다 흙과 모래 밖에 없습니다. 무엇 하나 심을 수 없고, 또 거둘 수도 없습니다. 즉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살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몸으로 익히고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에 있음을 의미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교회를 광야에 두셨다는 사실은 교회에 고난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교회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기에 교회에 실패는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사방에 풀 한 포기 나지 않고, 물 한 방울 찾을 수 없는 광야 같은 삶일지라도,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기에 그분의 공급하심으로 인하여 이 어려운 난관을 이겨낼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는 광야에 살고 있으나 홀로 있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성도의 삶에 고난은 있어도 실패는 없습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은 있어도 최후 승리는 교회에게 주어집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계시록 12장을 통해 이적을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서두에 이 이적들은 Sign 즉 우리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안내판’ ‘표지판’임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표지들이 무엇입니까? 큰 붉은 용, 사단이 이미 패배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당장은 큰 붉은 용이 아무리 날 뛰어도 즉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보여도요, 결국에는 종국에는 이 세상 최후 승리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것입니다. 사단이 아무리 교회를 공격하려 해도 교회는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기에 사단이 교회를 함부로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비진리도 사라질 것이고 진리만이 영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우리에게 최후 승리가 주어졌다는 것과 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있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지금 당장은 악이 만연한 것 같아도 우리에게 주어질 최후 승리를 믿고 인내하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