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4 영광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요한계시록 4장 1~11절)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당시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정부로부터 모진 핍박과 고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황제 숭배를 강요 받고 있었으며, 신앙을 포기하라는 억압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부인하고 로마 황제를 숭배하면 남들처럼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예수를 부인하고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배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교회는 하루하루 불안한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밖으로의 위기도 무시무시 했지만,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각종 이교적인 행위와 분열 그리고 영적 음란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는 이대로 무너지는가… 우리는 이대로 끝인가… 이런 절대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사도 요한은 그들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발견할 수 없는 가장 큰 희망을 본문을 통해 기록해 두었습니다. 과연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희망은 무엇일까요? 이 캄캄한 암흑과도 같은 절망 속에서, 사도 요한이 찾은 한 줄기 희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동서남북 그 아무 곳에서도 희망의 메시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불완전 했으며, 핍박을 당하고, 배교가 일어나고, 삶은 나날이 척박해져 갔으며, 상황은 더욱 악화 되었고, 절망과 죽음만이 그들의 벗이요 확실한 미래처럼 다가왔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가운데 사도 요한은 어느 날 환상 가운데 하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있는 열려 있는 문을 발견합니다. 모든 상황이 막혀 있는 같아도 여전히 하늘은 우리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하늘에 문이 열려 있다 한들 우리 힘으로 그 곳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때 요한에게 한 음성이 들립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바로 이 초청이 있기에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천상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사도 요한이 가장 먼저 바라본 것은 바로 하늘에 있는 ‘보좌’입니다. 보좌라는 단어에 한 번 동그라미를 쳐 봅시다. 이 단어는 요한계시록에 무려 40회나 등장합니다. 보좌란 통치자가 다스리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 누구든지 이 보좌에 앉는 존재가 바로 왕이며 통치자입니다. 1세기 로마 제국가 온 세상을 다스릴 때 보좌에 앉은 자가 바로 로마 황제 도미티우스 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요한은 환상 가운데 하늘에 베풀어진 보좌를 바라보게 됩니다.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로마 황제가 이 땅을 다스리는 것으로 보였는데, 하늘을 바라보니, 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역사의 전체를 다스리는 분은 따로 계셨던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인류의 역사는 로마 황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는 사실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위로를 줍니다. 아무리 악이 만연하고, 불의가 가득하고 범죄가 득실거린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심판하시고 정의로운 세상을 이뤄가실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사도 요한은 이 보좌 위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모습은 어찌 사람의 말로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빛나는 광채, 빛나는 영광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 보석들이 가진 빛의 특성들로 하나님의 성품을 엿보게 됩니다. 신학자들은 하얀 벽옥은 도저히 바라볼 수 없는 밝고 깨끗한 거룩함을, 붉은 홍보석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녹보석은 그의 자비하심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분의 보좌를 두른 무지개는 그의 언약을 상기시켜 주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냅니다. 요한이 이렇게 추상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을 묘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당연합니다. 인간의 유한한 언어로 하나님의 존재를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끔 아름답고 장엄한 자연 현상을 볼 때 “할 말을 잃었다.”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최고 성능을 자랑하는 카메라라 한들 인간의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듯이, 인간의 제한적인 언어로 하나님을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죠.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을 사도 요한은 자신이 아는 최고의 아름다운 보석으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사도 요한 말고 이 보좌 위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던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바로 보좌를 둘러싼 스물개의 보좌 위에 앉아 있는 이십사 장로들입니다. 이들은 흰 옷을 입고 금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이단들은 이 본문을 가지고 자기 교단을 위해 가장 앞장서는 스물 네 명의 리더들이 이십사 장로들이 되고 그들이 보좌에 앉을 것이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거짓 가르침입니다. 그럼 이십사 장로는 과연 누구일까요? 본문의 전 문맥인 요한계시록 3장 21절을 봅시다.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즉 오늘 본문 4장 4절 나오는 ‘24는 숫자 12의 배수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본문에 등장하는 ‘이십사 장로’라는 표현은 구약의 열두 지파 그리고 신약의 열두 사도를 상징한다고 해석하는데 이견이 없습니다. 즉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지금 이 이십사 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생은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십대 때 아이돌 가수에 빠진 아이들은요 모든 삶이 아이돌 중심이에요. 옷도 아이돌 가수처럼 입고, 화장도 아이돌 가수처럼 하고 말도 아이돌 가수처럼 합니다. 아이돌이란 말이 한국말로 우상이란 말이죠? 다 이유가 있습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 문제에만 사로 잡혀 살아갑니다. 표정이 우울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삶이 막막 합니다. 웃음이 사라지고, 밥맛도 떨어지고 왜 살아야 하나 하는 의문마저 듭니다. 문제만 바라보니까 자신이 초라해집니다. 인생은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요한은 고통과 핍박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하늘에 있는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바라보라 합니다. 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예배의 시작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예배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문제를 바라본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상황만 바라본다고 해서 해결책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죽음을 앞두고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야말로 바로 예배할 때입니다. 예배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 드리는 바로 그 때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십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상황이 변화됩니다. 문제가 해결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손이 간섭하시기 시작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지금 삶이 너무 힘들어서 예배 드릴 형편이 안 되요. 제 상황이 좀 나아지면 예배 드리러 갈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 드릴 형편이 안 되서 예배 못 드리는 게 아니라, 예배 드려야 그 문제가 해결 되는 거에요. 예배 드릴 때 우리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에게 기적을 베푸시고, 예배하는 자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한 거에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예배를 지키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진짜 힘들고 어려울수록 오히려 교회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세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10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0절을 보니 이십사 장로들이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 합니다. 이들은 입술로만 찬양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보좌에서 일어나 하나님 앞에 몸을 엎드려 예배합니다. 진정한 예배는요 입술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예배는 내 삶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면류관을 보좌 앞으로 던졌습니다. 이것은 야구선수가 포수에게 공을 던지듯 면류관을 하나님을 향해 단순히 던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면류관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물건을 상징합니다. 지금 이들은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또한 면류관은 최고의 명예와 귄력과 힘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내려놓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 하나님이라면 우리의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가치가 있으신 분이시지!”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참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예배를 뜻하는 영어 단어 ‘Worship” 이란 말에는 Worth 가치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에 따라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라는 거에요. 이십사 장로들이 발견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11절 말씀입니다.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하나님, 주님께서 온 세상을 지으셨네요. 만물이 주님의 뜻대로 창조되었네요. 그렇다면 주님이야말로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신 분이시군요!” 이십사 장로들은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이 본문을 읽던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환희에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 지금 이 세상을 로마 황제가 다스리는 것 같아 보여도, 하늘에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구나? 그 분이야말로 내 인생을 다스리고 계시구나?” 이 작은 깨달음이 그들의 삶에 큰 소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가 회복되어야 우리의 삶이 회복 됩니다. 예배와 삶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이 둘은 나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놓여 있어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계시며 보좌 가운데 앉아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슬픔 가운데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하늘 위 보좌에 앉아 계신 저 하나님을 바라 보시길 바랍니다. 그분을 예배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반드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