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07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요한계시록 2장 18~29절)

‘진리’와 ‘사랑’ 이 두 가지는 교회가 놓쳐서는 안 되는 두 기둥과도 같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두 날개로 날아가듯이, 교회는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 온전합니다. 진리와 사랑 중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반드시 다른 한쪽에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중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는 ‘진리’에 있어서는 바로 서 있는 교회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2절을 잠깐 보시겠어요?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진리의 칼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교회였어요.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경적 지식을 쌓는데 게으르지 않은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니골라당 같은 이단들이 공격해도 교회가 끄떡 없어요. 악한 자들을 다 색출해내고 거짓 사도들도 분별해 낼 수 있을 만큼 분별력도 뛰어난 교회였어요. 참 대단한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께 책망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이처럼 탁월한 ‘진리’는 있는데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는 거에요.
아내가 식탁에 올라오는 메뉴도 매일매일 바꿔가며 열심히 밥상도 차려주고, 집안 청소도 깔끔하게 하고 정리정돈도 잘 하는데 그 마음에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거죠. 남편을 사랑해서 같이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아내로서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는 거죠. 남편을 그냥 옆집 아저씨 대하듯 해요. 같이 사는 남편 입장에서 보면 이게 숨이 막힐 노릇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는 있는데 사랑이 없는 교회가 이와 같아요. 분명 겉으로 보면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데, 예배도 드리고, 순 모임도 하고, 찬양대도 서고 다 하는데 뭔가 교회가 삭막합니다. 진짜 어떤 교회는요 들어가 있으면 가슴이 탁 막히는 교회가 있어요. 교회가 아니라 딱딱한 기업 같은 느낌이 드는 교회들이 있어요.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거죠.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 책망하신 내용이 이거에요. “에베소 교회야 너희가 나를 위해 수고도 하고 열심도 있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 ‘사랑’이 없구나.” 주일학교 교사가 성경말씀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데 정작 그 안에 전혀 사랑이 없어요. 어떤 부모가 그 주일학교 교사에게 자기 아이들을 맡기고 싶어하시겠습니까? 우리 주님도 에베소 교회에게 경고하십니다. “네가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다시 스스로를 점검하고 너의 첫 사랑을 회복해라.” 아무리 머리에 진리가 가득해도 가슴에 사랑이 없으면 주님 보시기에 책망 받는 교회가 됩니다.
에베소 교회는 진리와 사랑 이 두 가지 중 진리에 치우쳐 있던 교회죠.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두아디라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전혀 다른 극단에 치우친 교회에요. 에베소 교회가 진리는 있고 사랑이 없는 교회였다면,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은 있는데 진리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9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2:19)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여기서 사업이란 단어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주님의 일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보실 때 두아디라 교회는 정말 많은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였어요.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가 불우이웃돕기 바자회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홈리스 노숙자들 식사제공하고, 여름 되면 선교지 가서 집도 고쳐주고, 페인트 칠도 해주고 다방면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러한 두아디라의 열심을 칭찬하세요. “두아디라 교회야 너가 교회 초창기보다 더 많은 사역들을 감당하고 있구나. 선교사역도 하고, 구제사역도 하고, 사회봉사도 하고 나도 너가 이런 수고를 하고 있는 거 알고 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이렇게 열심히 사역하고 섬기던 교회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책망을 하십니다. 20절 말씀을 함께 또 읽겠습니다.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교회에는 정말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때 교회가 ‘진리’는 뒤로하고 ‘사랑’만 너무 강조하다 보면 교회가 마치 도떼기시장처럼 변질되어 버립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이 점을 놓쳤어요. 우리가 읽은 20절 말씀을 보니까 이 교회 안에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이란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 여자 이름이 진짜로 이세벨이란 것이 아니라, 구약에 나타나는 이세벨처럼 행동했다는 의미입니다. 서양에서는 백성공주 이야기 속 등장하는 왕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고, 한국에서는 심청전 속 등장하는 뺑덕 어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죠? 유대인들에게도 ‘이세벨’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세벨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가장 사악한 여인입니다. 원래는 시돈 왕 딸이었는데 이스라엘 아합 왕의 아내로 시집을 오게 됩니다. 그런데 시돈에서 이스라엘로 시집 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않고 나무로 만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을 다 헐어버리고 거기에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세워둡니다. 그리고 하나님 잘 섬기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꾀어서 바알 우상을 섬기고 절하게 만들었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850명을 상대하여 이긴 엘리야 선지자를 죽이겠다고 협박한 아합 왕의 아내가 바로 ‘이세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세벨이란 이름을 쓴 것은, 두아디라 교회에 어떤 특정한 여인이 교회의 교인들을 잘 못 인도한 것으로 해석이 됩니다. 20절에 보면 ‘자칭 선지자’라는 명칭이 있는 걸로 봐서는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임명한 사역자는 아닙니다만, 이 사람이 가진 교회 안의 영향력이 상당했다는 거죠. 거짓 선지자 이세벨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선택하여 제자훈련 하신 것처럼 사단도 자신을 섬길 사람들을 택하여 제자훈련 합니다. 거짓 선지자 이세벨이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거짓 가르침으로 꾀어 그들을 자신의 제자화 시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오래 된 기록들을 살펴보면 실제로 이 여인이 상당히 말을 잘한 거 같아요. 사회적으로 상당한 위치에서, 잘 나가고 비싼 옷 멋지게 입고, 언변도 능통하니까 사람들이 들으면 혹하는 게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 이단이 교회에 들어와서 가르치는 거 보면 사람들 귀가 쫑긋 설 내용들이에요. 이들이 잘 하는 게 무엇입니까? 주로 다니엘서, 에스겔서, 요한계시록 이런 어려운 책들 숫자와 상징을 풀어줍니다. 이 숫자는 이런 뜻이야. 순진한 사람들은 그거 들으면 “우와…이런 놀라운 뜻이!”하고 반은 넘어갑니다. 거기다 단어풀이도 기가 막히죠. “이런 뜻이 있었어?” 하면 막 빠져듭니다. 24절에 보면 이러한 가르침을 “사단의 깊은 것”이라고 표현 합니다. 깊은 가르침 같은데 하나님께로 온 가르침이 아니라 사단의 가르침인 거죠. 이단들이 교회에서 듣도 보도 못한 가르침들을 전해주니까 신기하죠. 교회에서 듣지 못한 내용은 틀린 내용이니까 목사님들이 틀린 내용이니까 안 가르치니까 못 들어 본거죠. 한참 새로운 가르침에 빠져 있다가 이단들이 또 와서 “근데 우리 목사님 좀….” 하고 마음에 바람 넣으면 바람에 볏단 쓰러지듯이 휙휙 넘어갑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교회 다닌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다니는 거에요. 그러니까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이 보통 성도들이 아니라는 거에요. 목숨 걸고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도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 안에 한 번 들어오고 나니까 교회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는 거에요.

2. 회개할 기회를 주심.
두아디라 교회 안에 거짓된 가르침에 빠진 교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회개의 기회를 주셨어요.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여기서 기회를 주셨다는 표현은 딱 한 번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계속해서 기회를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회개합니까? 아니요 그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기회’라는 단어는 영원한 기회가 아니에요. 이 기회라는 단어는 본래 일정한 끝이 정해진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 입니다. 회개의 기회는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문이 굳게 닫힙니다. 이것은 비단 이단에 빠진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회개의 기회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도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가 아닌 비진리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향해서 주님은 회개의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본문 22-23절 말씀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주어질 형벌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22-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22절에서 침상에 던진다는 표현은 그들이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 침상은 한 번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죽음의 침상입니다. 또한 그들을 큰 환난에 던지십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다가올 7년 대환난 기간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삶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주어진다는 거에요. 23절에는 그들의 자녀들이 죽게 됩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육신적인 자녀들이라기 보다는 거짓 선지자의 가르침을 받은 영적 자녀들을 의미힙니다. 사단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자들의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지금 당장은 거짓 선지자들이 힘이 쌔고 우세한 거 같아도,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이러한 심판들이 그들에게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진리를 따라 사는 자들, 과거에 잘못을 회개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도 있습니다. 26-2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은 모두 왕과 같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게 됩니다. 얼마나 큰 힘이 주어지느냐 하면 쇠막대기로 유리그릇을 깨뜨리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권세가 주어집니다. 28절에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새벽 별, 샛별이 주어집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 말씀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이 칠흙 같이 컴컴하고 춥고 어두운 세상의 밤을 밝히는, Morning Star, 새벽 별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님은, 주님 자신을 주실 것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복 중에 이 세상에서 주님 자신보다 더 큰 복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사랑만 있으면 안 되요. 사랑과 진리가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지금 내 모습이 정말 성경적인 것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 하는 질문들을 스스로 던져보아야 합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늘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품어 주기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옳고 그름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코너스톤 교회가 ‘사랑’과 ‘진리’ 이 두 기둥이 함께 든든히 서 있는 교회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