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06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요한계시록 2장 12~17절)

본문에 등장하는 버가모는 아시아에서 이사 가고 싶은 지역, 살고 싶은 도시하고 물으면 상위권에 들만한 도시입니다. 버가모 도서관에는 20만권의 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지금 웬만한 도시 도서관에 가도 10만권 이상 책을 보유하고 있는 도서관을 찾기가 어려운데, 무려 20만권이나 소장하고 있으니 도시가 엄청난 지적 재산을 갖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버가모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병을 잘 고치는 도시로 유명했습니다. 돈 많은 환자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버가모로 몰려드는 거죠. 히포크라테스 다음으로 유명한 ‘갈렌’이라는 의사도 이 도시 출신입니다. 게다가 도시의 건축물들도 화려합니다. 언뜻 보면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이 도시. 그런데 13절 주님은 버가모를 향해서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 부르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 살기 좋은 도시인데 주님은 그 도시를 ‘사단이 거하는 곳’으로 부르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버가모는 아시아에서 가장 앞서가는 이방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앞서 말한 도서관의 20만권의 책들은 대부분 헬라철학과 음란한 문화를 다룬 서적들이었습니다. 소아시아에서 병을 가장 잘 고치는 장소로 알려져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보니 그들이 인도된 곳은 ‘에스칼피우스’ 란 이름의 ‘치유의 신’을 모신 신전이었습니다. 이 신의 제단에 살아있는 독사를 모셔다 두었습니다. 그리고 치료를 받은 이들은 이 뱀 앞에서 절을 하며 병 낫기를 위해 뱀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도시가 유명한 곳은 높이만 무려 40피트, 12미터에 해당하는 제우스 신의 제단이었습니다. 일년에 한 번씩 황제숭배가 강하게 요구 되는 곳이 바로 이 버가모 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살기에 좋아 보이는 요건들을 다 갖추었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버가모는 영적 암흑의 도시, 죄악의 도시, 우상의 도시, 귀신들의 도시였던 것이지요. 바로 이 ‘사단의 도시’에 버가모 교회가 있었습니다. 13절 말씀 읽겠습니다. (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 믿음을 저버리지 않음
우리 주님은 버가모 교회의 교인들의 처한 환경이 어떤가를 다 알고 계십니다. 이 영적으로 어두운 환경 가운데서도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점을 칭찬하십니다. “
13절에 등장하는 ‘충성된 증인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의 담임목사님입니다. 서머나 교회에서 순교한 폴리갑이 있었다면 버가모 교회에는 안디바가 있었습니다. 사단은 이처럼 교회의 리더들을 공격한 거죠. 기독교 순교사화를 보면 안디바의 순교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안디바를 잡아다가 로마의 황제 신상 앞에 세워둡니다. 관리가 그에게 이야기 합니다. “안디바야 로마의 환제 신상에 절을 하라!”, 그러자 안디바가 답하기를 “만왕의 왕, 만주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니 예수님 외에는 내가 절하지 않겠노라.” 로마관리가 노하여 “안디바야 온 세상이 너를 대항하고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하고 호통을 칩니다. “그렇다면 나는 온 세상을 대항하여 예수를 만주의 주로 시인하노라.” 드디어 안디바의 사형이 진행 됩니다. 사형 방식은 화형이었습니다. 그러나 화가 난 로마 관리들은 끝내 황제신상에게 절하지 않은 안디바가 괘씸하고 또 그리스도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은 나무를 모아 뜨거운 불을 붙이고 그 위에 놋 가마를 달구었습니다. 그리고 그 뜨거운 놋 가마 속에 안디바를 넣어 죽였습니다. 우리가 요리하다가 실수로 달궈진 후라이펜에 손이 대면 얼마나 뜨겁습니까? 그런 뜨거움 속에서 처참하게 순교를 당하면서도 안디바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안디바를 필두로 버가모 교회는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핍박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온 버가모 교회는 놀랍게도 작은 부분에서 흔들립니다.

2.타협한 교회 = (발람의 교훈, 니골라 당의 교훈)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죄는요, 도미노 같아요. 한 번 무너지면 끝까지 같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도 처음부터 “죄 지으러 가야지!”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압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까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도 먹게 됩니다. 그 때부터 급격하게 무너집니다. 모압 여인들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이미 모압은 우상 앞에서 행음 하는 것을 하나의 종교적 행위로 여기던 나라였습니다. 맨날 광야에서 만나랑 메추라기 먹다가 이스라엘 남자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산해진미 음식을 먹으니까 기분이 좋지요. 한참 배불러 기분 좋은 그들 앞에 아름다운 모압 여인들을 데려다가 우상의 제단에서 음란한 춤을 추게하여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 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남자들이 그 모압 여자들과 함께 음행을 범하게 됩니다. 또 성적 순결함이 깨지니까 이제는 아무 거리낌 없이 모압 우상들에게 절합니다. 처음에는 “가서 밥만 먹고 와야지.”하는 영적 안일함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에 ‘죄’에 대해서는 어떠한 틈도 주어서는 안됩니다. 물을 보관하는 댐에 새끼손가락만한 조그마한 구멍이 나서 물이 졸졸 새기 시작하면요, 나중에는 그 틈새로 나오는 수압 때문에 댐에 금이 가기 시작해서 결국 댐이 무너집니다.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것 하나가 무너지면 결국 다 무너집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로 심판을 받아 죽은 자가 무려 2만 4천명입니다. 아무리 저주하려 해도 저주가 임하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 스스로 자멸합니다.
버가모 교회가요, 황제 숭배하지 않으려고 신앙은 잘 지켰어요. 안디바와 같이 뜨거운 놋 가마에서 죽어갈 순교를 각오하며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큰 것은 잘 지켰으나, 작은 것에서 타협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로마의 신전에서 섬기는 창기들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수많은 성도들이 어쩌면 이 버가모 교인들 같습니다. 큰 싸움은 이겼어요. 굵직 굵직한 신앙생활들은 절대로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작은 것에서 어쩌면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서 넘어집니다. 큰 일은 잘 하는데 작은 데서 넘어져요. 교회도 보면요, 분열 되는 거 보면 세상의 핍박이나 이단의 공격 때문에 무너지는 게 아니에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들로부터 시작해서 무너집니다. 지금은 아무런 영향도 없어 보일 만큼 작은 일들이 훗날 우리 인생의 큰 일들을 결정합니다.
3.회개하라 (감추었던 만나, 새 이름 기록 된 흰 돌)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교훈에 문을 열어 준 버가모 교회를 향해 주님은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회개는 단지 감정적 뉘우침과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적 후회와 회개를 동일시합니다. ‘지난 날 지은 죄에 대하여 잘못을 인정하는 것.’ 이것은 뉘우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며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고 뉘우쳤으니까 회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단순히 감정적 후회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그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는 그 자리로 가지 않는 자리 이동입니다. 예를 들면 도둑이 자신이 밤에 물건을 훔친 행위에 대하여 ‘아, 내가 잘 못했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구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행위를 저질렀구나? 다신 하지 말아야겠다.’하고 결심하는 행위는 후회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후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의 집 담장을 넘어다니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후회지 회개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 입니다. 이것은 명령이며 경고입니다. 16절 후반부에 회개하지 않는 자는 주께서 직접 그 분의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또한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주실 상급도 말씀하셨습니다.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우리 주님께서 회개한 자에게 주실 두 가지 상급 중 첫 번째 상급은 ‘감추었던 만나’ 입니다. 본문에서 만나를 그냥 ‘만나’라 하지 않고 ‘감추었던 만나’라고 합니다. 즉 하늘에서 영혼 속으로 때때로 내려오는 그리스도의 영의 위로와 감화는 다른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음식을 포기했을 때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던 것처럼 오직 세상적인 즐거움과 영광을 포기하는 자에게 영적인 복인 감추었던 만나를 주십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두 번째 상급은 흰 돌입니다. 고대시대 재판관이 무죄 판결을 받은 자에게는 죄로부터의 사면 선언으로서 흰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자에 앞에는 검은 돌을 던졌습니다. 유죄 시에는 검은 돌을, 무죄 시에는 흰 돌을 준 것이지요. 따라서 흰 돌의 의미는 죄사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버가모 교회는 큰 싸움에는 승리하였으나, 작은 싸움에서 패배한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또한 이는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우상숭배하지 않고,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열심히 나오지만, 정작 세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 삶에 남아있는 세상과 타협하여 살아가는 죄의 모습들이 있다면 과감하게 끊어내는 귀한 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