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05 환난과 궁핍에도 죽도록 충성하면 (요한계시록 2장 8~11절)

서머나 교회는 매우 어려운 상황과 환경에 놓인 교회입니다. 화려한 건물도 없으며, 오히려 교회라 말하기도 어려운 캄캄하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 나는 공간에 모인 교인들, 겉으로 보면 무엇 하나 자랑할만한 요소가 없는 교회 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이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뭐 그리 대단할 것 없는 교회입니다. 지금도 서머나에 가 보면 로마 신전들은 과거의 위엄과 화려함을 가늠해 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에 가보면 교회 유적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당시 로마의 핍박으로부터 숨어 모여야 했기 때문에, 가정교회로, 카타콤 지하교회로, 비밀교회로 모여야 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반듯한 교회 건물 하나 없었습니다. 그만큼 교회가 초라했던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주님께 별 다섯 개 받은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위치한 서머나란 도시는 지금은 ‘이즈미르’라고 불리는 터키의 항구도시로 지금도 이스탄불, 앙카라 다음에 가는 터기 3대 도시 중 한 곳입니다. 예로부터 건포도와 포도주 및 대리석, 의류 수출로 많은 부를 축적한 부유한 도시 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글을 쓰던 당시 도시에는 경기장과 도서관 등 문명의 가장 큰 혜택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공증 극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서머나에서 만들어진 동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름다움과 크기에 있어 아시아에서 제일인 도시.” 이것은 단지 그 도시 사람들만이 가진 자부심이 아니라, 실제로 로마의 많은 귀족들이 이 곳에 와서 휴양을 즐기고 갈 정도로 서머나가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도시 전체가 예술적 미와 도시적 자부심이 상당한 도시지요. 서머나의 별명만 봐도 ‘아시아에서 가장 사랑스런 도시, 아시아의 꽃, 아시아의 면류관’이라 불릴 정도이니 얼마나 도시가 아름답고 화려했을까요?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아름답다 보니 이곳에는 로마 여신들의 신전이 많았습니다. AD 26년 티베리우스 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우기 위해 11개의 도시를 놓고 심사를 해서 그 중 황제에 가장 충성스러운 도시를 뽑아 신전을 세우려 했을 때 뽑힌 도시가 바로 서머나 입니다. 최초의 황제숭배 도시이자, 로마 황제를 충성스럽게 신으로 숭상하는 것에 있어서는 타에 추종을 불허하던 도시였습니다.
이렇게 화려했던 도시 서머나에서도 상권을 주름 잡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오늘이나 옛날이라 유대인들은 비즈니스에 큰손 입니다. 로마는 특이하게도 이 유대인들에게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생활과 자유를 허락합니다. 그들은 이미 로마 제국의 정치와 종교에 많은 연줄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없으면 도시에 장사가 안되거든요. 정치적, 경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거죠. 그런 유대인들이 볼 때 나사렛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미움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정부에 고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가 추구하는 세계 평화를 파괴하고 있으며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황제숭배 거부를 고발하는 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신전에서 거해지던 황제숭배는 모든 상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길드’라 불리는 상인조합 회원 자격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길드 회원이 아니면 상거래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황제숭배를 안 하면 먹고 살 길이 막히는 거에요…
서머나교회 성도들도 유혹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당시에 길드 멤버쉽 가입절차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시저는 내 주요 시저가 내 하나님입니다.” 이 말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거에요. 그러나 서머나교회 성도들은 직장에서 쫓겨난다해도 상거래가 금지 된다한들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런 경제적인 곤경과 사회적 압박 속에서 서머나 교회는 매일매일 시달리며 살아 간 거죠.
그 뿐만 아니에요. 예배 드리다가 발각되면 그 즉시 십자가형, 화형 아니면 콜로새움에서 사자밥이 됩니다. 오늘 여기서 예배 드리는데 경찰들이 들이 닥쳐서 장로님 집사님 하나 둘 잡아가서 감옥에 넣는다고 한 번 생각해보세요. 어느 누가 교회에 쉽게 예배 드리러 오겠어요? 우리는 예배 드리는 자유를 너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때가 많아요. 그러나 지금도 예배의 자유를 얻지 못한 나라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배 드리러 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몰라요. 예배 드리러 나올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머나교인들은요. 죽을 수도 있는 위기 상황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예배하러 주일이 되면 가정으로 지하로, 모이고 또 모입니다. 지금 중국에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비밀교회로 모이는 것과 비슷한 처지에요. 공안들이 예배 장소를 찾아내서 잡아내고 그들을 감옥에 가둬두는 것처럼 서머나교회도 환난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실 예배만 안 드리면 아무도 그들이 그리스도인인지 몰라요. 그런데도 이들은 잡힐 걸 알고도 각오하고 매주 목숨 걸고 예배 드리러 모이는 거에요.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서머나 교인들아 너희가 당하고 있는 그 고난과 가난을 내가 다 알고 있단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아마 그들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가 당하는 환난과 궁핍을 아시는구나…” 본문에 나오는 환난이란 말은 원어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짓눌린 상태’를 의미하며, 궁핍이란 단어는 ‘구걸해야 연명하는 무일푼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은 모든 상거래가 금지 되었으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고, 이웃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욕먹으며 왕따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들의 슬픔을 보시고 ‘내가 네 고통과 가난을 다 안다.’ 고 말씀하고 계신 거죠.
주님은 이어서 말씀 하십니다. “나는 너의 고난과 가난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너는 부요한 자이다.” 가난과 매일매일 싸워가는 서머나 교인들을 향해 주님은 “너희는 가난하지 않아. 너희는 부요한 자야.”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하는 ‘부요함’이란 세상이 말하는 물질적 부요함과는 그 뜻이 다릅니다. 본문에서 나타나는 부요함이란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소유 안에서 부유함을 의미합니다.
9절 말씀 후반절을 보니까 주님이 유대인들을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아직 구약 율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유대교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그들은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부르지만, 그들의 실상은 사단의 회이다.’라고 강력하게 그들을 비판하십니다.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커갑니다. 양과 염소가 함께 자라가요. 서머나교회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게 당시 다른 민족들이 아니라, 바로 누구보다 그리스도인들을 잘 아는 유대인들이었다는 거에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누가 진짜 유대인인지, 아니면 사단의 회에 속한 사람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 우리 주님은 분명한 선을 그어서 알곡은 곳간에 저장해 두시고, 가라지는 불에 던져 넣으실 것입니다.
9절에서 주님은 서머나교회를 향해 ‘내가 너희를 안다.’고 그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자, 서머나 교인들은 이제 주님께서 그들을 향한 메시지를 듣기를 원했어요. 이제 주님이 고난을 좀 끝내주시려나? 이제 주님이 우리가 당한 고난만큼 복을 주시려나? 그러나 10절 말씀은 모든 이들의 예상을 넘어간 대답이었습니다.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0절 말씀을 다시 말하면 이런 거에요. “서머나 교인들아 너희 정말 고생 많았다. 그런데 말이야. 이제부터가 진짜야.” 어느 군인이든지 전투 하나 이겼다고 퇴격하는 부대는 없습니다. 전쟁이 끝나기까지 최후 승리를 얻을 때까지 싸우는 게 군인의 본분이에요. 오늘 주님이 서머나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그와 같아요. ‘아직 끝이 아니야, 가야 할 길이 더 남아 있어.’ 10절에서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한다는 것은 꼭 감옥에 들어간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당할 여러 가지 환난을 의미합니다.
충성하라는 말은 ‘주께서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주님 보실 때 서머나 교회가 바로 주님께서 믿고 자신의 사명을 맡길 수 있는 교회였던 거에요. 그래서 주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해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서머나교회에 너 죽도록 충성해라.” 이 말은 단순히 ‘죽을 만큼만 열심히 해라.’가 아니라, 말 그래도 ‘죽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말고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10절 후반절을 보니까 죽도록 충성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무엇을 주십니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오늘날 올림픽에서 이기면 금메달 주죠? 옛날 로마시대 때는 운동경기에서 이기면 월계관을 주었어요. 은유법입니다. 경기를 이긴 자에게 월계관이 주어지듯이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린 이에게 내가 상으로 면류관을 주리라. 그런데 그냥 면류관이 아니고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일곱가지의 면류관이 나옵니다.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썩지 않는 면류관,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 영화의 면류관, 정금 면류관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올림픽 시상식에서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만 있는게 아니라, 우리 주님이 그의 종들에게 주시는 면류관도 종류가 다르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 의의 면류관은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고 믿음을 지킨 자’에게 주는 면류관입니다.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은 ‘충성을 다해 전도 많이 한 자’에게 주는 면류관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생명의 면류관은 누구에게 주는 거에요? (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우리 앞에 다가오는 시험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오히려 시험이 있어야지만 우리가 그 시험을 이겨내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