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21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고 (마가복음 10장 17-22절)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아 왔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람을 ‘청년’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청년은 30세 미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20대 즈음 되는 청년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사람을 ‘관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관리’는 사회적으로 지위와 신분이 높은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2장 58절에서는 그의 직업을 ‘아르콘’이란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는데요. 이 단어는 ‘법관’이란 뜻 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람에 대한 정보가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우리는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정보들을 모아, 예수님을 앞에 나아온 이 사람이 30세 미만, 아마도 20대의 법관이 직업인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편의상 마태복음의 기록을 따라 오늘 이 사람을 ‘청년’이라고 칭하겠습니다.
오늘 그가 예수님께 나온 이유는 단 한가지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에서 해결해야만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7절에 그가 뭐라고 질문합니까?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청년 어려서부터 십계명에 기록된 내용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 왔습니다. 부모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부모 말에 순종하며 잘 모셨습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탐심 이러한 죄로부터 멀리하여 자신의 영혼을 지켜왔습니다. 그는 이러한 도덕적인 삶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 얻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지켜온 율법이지만, 그것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란 확신은 없었습니다. “혹시 내가 구원받기 위해 더 해야하는 일은 없을까? 천국에 가기 위해 지금보다 더욱 더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오늘 17절에 이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한 것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청년은 사람이 무언가의 행동을 해야지만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행이나 구제, 나눔과 섬김 같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우리가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청년이 가진 구원론은 잘 못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선행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스스로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한다고 해도, 그 안에 있는 죄악을 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해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준 앞에 서면 여전히 더러운 죄인일 분입니다. 그러니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인간의 선행이나 도덕적인 삶을 산다고 해서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천국에 갑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르를 믿는 믿음으로 천국에 갑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을 위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구원을 은혜라는 이름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받는 것이죠. 에베소서 2장 8-9절 말씀대로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함과 같습니다.
자, 이 청년은 은혜가 아직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평생 율법에 기록된 내용대로 살려고 애를 쓰며 십계명도 지켜왔으나, 아직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 영생을 얻기 위해 무언가 더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드디어 주님을 찾아온 것이죠. 이 청년이 영생이란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한 자세를 가졌는가 하면, 17절에 예수님 앞에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19절에 예수님은 십계명에 있는 내용들을 열거 하셨습니다. 순서상 보면, 6, 7, 8, 9, 10 계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5계명 순서대로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십계명 중 1-4 계명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이 청년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이기에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이 질문에 이 청년 아주 당당하고 자신 있게 자신은 이 모든 것들을 어려서부터 지켜왔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요즘 주일에 십계명 말씀을 살펴봐서 잘 압니다만, 10가지 밖에 안되는 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예수님께 자신 있게 “네, 예수님 이런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지켰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어려서부터 말씀을 열심으로 순종하려한 그의 모습을 주님께서 기쁘게 보신 것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에게 아직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주시는 대답을 듣고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다 지키고 그 위에 한 가지 계명을 더 얹어서, 즉 11가지 계명만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없는 결정적인 한 가지를 지적하시므로 그가 찾는 영생이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를 강조하고 계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도전하셨습니다. “자네에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네. 가서 자네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게나.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오늘 예수님의 이 요청은 단순히 “가진 재물 다 팔고 나를 따르라”가 아닙니다. 이 질문 근저에 깔려 있는 예수님의 요청은 주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어보셨던 질문과 같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주신 단도직입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자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재물을 더 사랑하는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초청인 것이죠. 앞서 말한대로 이 청년 ‘법관’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검사’ 혹은 ‘변호사’ 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직업을 가지고 이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부유합니다. 22절에도 보니 이 사람은 가진 재물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부자인거죠. 만일 이 사람이 오늘날 차를 타고 예수님 만나러 왔다면 2019년도 S 클라스 벤츠 아니면 포르쉐 이런 차 몰고 왔겠죠. 자타공인 부자 입니다.
결국 이 청년 커다란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을 따르자니… 포기해야 할 재물이 너무 많은 거에요. 만일 자산이 얼마 안 되었으면 “네, 주님 뭐 이 정도야 제가 내려놓죠!”하고 예수님을 따라 갔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이 청년은 가진 재물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자니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이 어마어마 합니다. 결국 이 청년은 예수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슬픈 얼굴을 띄고 근심하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오늘 이 청년은 얼마나 당당하게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까? “그래 나 정도면 천국 갈 수 있지 않을까? 어려서부터 십계명도 잘 지켜왔는데?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 아닌가?” 그러나 예수님을 떠날 때 그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내가 아직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구나… 난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섬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착각이었구나. 내게는 아직도 찍어버리지 못한, 버리지 못한 재물이라는 우상이 남아 있구나…”
오늘 우리가 이 청년의 입장이었다고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님께 질문 드렸어요. “예수님 저 잘 하고 있나요? 예수님께서 제 삶을 보시기에 괜찮은가요? 매일 아침 단잠을 깨어 새벽예배도 나오고, 시간 되면 기도도 하고, 씀 보고 하루 시작하고… 예수님, 이 정도 저 신앙생활하고 있으면 그래도 잘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요? 21절 말씀이 그 답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사랑하는 목소리로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구나… 너가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 그것이 내게 우상처럼 남아 있구나… 가서 네가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 보다 더 의지하는 것, 하나님 보다 더 사모하는 그것을 버려라. 그것을 정리해라. 그것을 끊어버려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사람이거나, 감정이거나, 물건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본문에 나오는 청년처럼 우리가 하나님 보다 사랑하는 것이 재물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 하루 우리가 하나님보다 예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내려 놓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