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4 능력은 기도로부터 시작 (마가복음 9장 25-29절)

어느 날 밤 늦은 밤 저녁 시간에 불신자 친구에게서 불쑥 전화가 온 거에요. “김 집사! 자네 교회 다니지? 자네 혹시 우리 집에 좀 와줄 수 있겠는가? 내 아들이 이상하네!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변했고, 하는 짓도 인간이 아니라 마치 영화에서 본 것처럼 귀신들린 것 같네. 자네 교회 다닌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금 우리 집에 와서 내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없겠는가?” 얼마나 마음이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당장 교회 목사님 혹은 장로님한태 전화해서 자초지정을 말씀드리고 친구네 집에 함께 가주시면 안되냐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필 교회 목사님께서 타 주에 출타 중이시면 또 얼마나 난감할까요? 친구가 도움을 요청하고 오라고 간철히 요청했으니 가긴 가야 하는데, 귀신을 쫓아내는 기도를 해 본적도 없고, 괜히 기도해서 잘 못되면 어떻하나 두렵고 너무 막막한 거에요.
오늘 본문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자기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제자들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하필 예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안 계십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데리고 산에 기도하러 올라 가셨습니다. 산 아래 있던 9명의 제자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이들은 아버지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 했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낼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전에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장 7절 말씀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막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 여행 보내시기 전 12명의 제자들을 두 명씩 짝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전도 여행을 보내셨습니다. 이 전도 여행을 통해 제자들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던 귀신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제자들 앞에서 항복하고, 떠나갔던 것이죠. 누가복음 10장 17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기뻐하며 돌아와서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 앞에 항복하더이다!” 하고 예수님께 전도 여행을 보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 이처럼 이전에도 예수님 없이 자신들이 직접 귀신을 내어쫓은 경험도 있으니, 이번에도 못 할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자신 있게 귀신 들린 아들을 고쳐보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용을 써봐도 귀신이 꼼짝하지 않는 것이죠. 이상합니다. 전에 전도여행 갔을 때는 분명 귀신이 쫓겨 나갔는데, 이번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거에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합니다. 이 때다 싶어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조롱하며 예수당은 사기꾼이라고 비난합니다.
때 마침 산 에서 내려 오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리 하셨듯이 말씀으로 귀신을 내어쫓으셨습니다. 25절 입니다. “(막 9: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나오라 명령하시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26-27절 입니다. “(막 9: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막 9: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나오라 명령하시니 아이를 붙들고 있던 악한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두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던 제자들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졌을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왜 이전에는 분명 제자들이 귀신을 내어쫓았는데, 이번에는 실패했던 것일까요? “왜 예수님은 되고 우리는 안 될까?” “ 왜 이전에 전도 여행 갔을 때는 귀신이 쫓겨갔는데, 지금은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의아해 하던 제자들은 사건이 일단락 된 후, 사람들이 다 떠나가자, 예수님과 따로 있을 때 조용한 목소리로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 이전에 전도 여행 갔을 때는 분명 귀신을 쫓아냈는데, 어째서 저희는 이번에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2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막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대답에 의하면 제자들은 사역의 현장에서 왜 실패 했습니까? 기도하지 않아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를 하지 않은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기하죠?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 아니십니까? 그 분의 삶이 기도였고, 기도가 곧 그의 삶이었는데 예수님과 지난 3년간 가장 가까이 지내던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에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을까요?
신앙생활은 하지만, 기도하지 않고, 교회는 다니지만 말씀을 게을리 보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 아닐까요? 자신의 삶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신학교 간 20대 신학생들을 보면, 기도 안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성경 안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도 젊으니까 열정 가지고 사역하고, 체력이 좋으니까 힘으로 사역합니다. 그러나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볼 때는 밤낮으로 열심히 사역하는 것 같은데, 자꾸만 사역이 꼬여만 갑니다. 이상하죠? 그러나 우리들은 이 이야기만 들어도 문제의 맥이 딱 잡히지 않습니까? 기도의 무릎을 꿇지 않고, 말씀 연구에 부지런 하지 않는 목회자가 어떻게 열매를 맺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사역의 현장에서 반드시 가져야 할 한 가지가 바로 ‘기도’임을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직업 내려놓고, 풀타임 사역자가 되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 따라다닌 다고 해서 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무작정 교회만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은혜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사역을 무작정 열심히 한다고 해서 꼭 열매 맺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귀신을 쫓아낼 만한 능력이 ‘기도 이외에는’ 없다고 한정 지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수단과 방법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만으로 해야 한다는 뜻 입니다.
요령 가지고 사역하는 사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식 가지고 사역하는 사람은 메마르게 됩니다. 체력 가지고 사역 하는 사람도 지칠 때가 찾아옵니다. 제자들처럼 기도 외에 다른 수단이나 방법 사용하면 아무런 열매도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귀신들린 소년 앞에서 지난 날 자신들의 경험적 능력만을 의지하였을 뿐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지난 날 경험으로 사역하는 사람은 반드시 한계를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살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매일 같이 만나를 먹으러 나가라고 하셨습니까? 어제의 만나로 오늘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어제 새벽예배 나왔는데 오늘 또 나옵니까? 어제의 기도로 오늘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살 수 없습니다. 오늘은 또 오늘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거에요. 그래서 믿음의 경주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는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지속시켜 나가는 모습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거죠.
자동차는 가스로 움직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녀도 가스가 떨어지면 차는 멈추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운전하는 사람들은 계기판을 주시하며 혹시라도 가스가 다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점검합니다. 만약 한참 주행 중에 가스가 떨어져 차가 도로 한 복판에서 서게 된다면 이보다 더 큰 낭패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불의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때마다 게스 스테이션에 들려서 게스를 다시 넣어줘야 하는 것이죠.
가스가 떨어진 자동차가 멈추어 버릴 수 밖에 없듯이, 기도가 떨어진 자의 사역도 멈추어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에게 아무런 능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은 바람에 추운 날 도로 위에 멈추어 서 버린 자동차 주인처럼 커다란 낭패를 본 것이죠. 그런데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자리를 포기하는 순간, 기도의 헌신을 멈추는 순간 우리들도 게스가 점차 떨어지는 것입니다. 뿌리가 뽑힌 장미 꽃은 당분간 살아 있는 것 같아도 한 주도 못 가 말라 죽어 버립니다. 우리 핸드폰도 그렇잖아요? 다 충전 되어 있는 것 같아도 하루 이틀 지나면 꺼져 버립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사용한 후 충전하지 않습니까?
영적인 원리도 동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방전된 우리의 영혼을 가지고 다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가야 합니다. 기도의 골방으로 나아가고, 무릎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저 왔습니다.” “주님, 주님 없이는 오늘 이 하루를 살아갈 수 없기에! 주님을 떠난 순간 저는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오늘도 주님 만나러 왔습니다!” 늘 기도를 통해 주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떠나 살 수 없습니다! 기도는 영적 호흡 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어떻게 숨쉬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 안의 죄를 고백하는 기도의 날숨, 하나님의 간구하심을 구하는 기도의 들숨. 이 두가지가 계속 있어야 사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적 게스 스테이션은 어디 입니까? 언제 어디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은밀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의 골방은 어디 입니까? 기도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기도의 자리를 몸부림 치며 사수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공급받으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 안에서, 기도의 산 간증들을 만들며 살아 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