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3 믿는 자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9장 14-24절)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올라가 계신 동안, 산 아래에서는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아들을 데리고 와서, 그를 고쳐달라고 부탁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자들이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못하자, 서기관들은 이 때다 싶어 제자들을 흠 잡고 궁지로 몰았습니다. 때 마침 산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논쟁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화들짝 놀라 정신없이 수차례 인사를 드렸습니다.
다소 혼란스런 이 상황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먼저 저들이 논쟁하고 있던 내용이 무엇인지 물어보셨습니다. 그러자 논란의 중심이 된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직접 나서서 예수님께 이야기 합니다. ““선생님, 제가 아들을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는 말 못하게 하는 더러운 귀신이 들려 있습니다. 귀신이 한번 아이를 사로잡으면 아이가 땅에 거꾸러집니다. 그러면 아이는 입에 거품을 물고 이를 갈면서 몸이 뻣뻣하게 굳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부탁했지만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아버지는 아들의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이 다급하고 절박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누가복음을 보면 이 아들은 아버지의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이었습니다. 단 하나 뿐인 아들이 귀신에 들려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자기 아들을 치료하지 못하자 깊은 실망에 빠졌습니다. 귀신들린 아들은 벙어리 귀신이 들렸습니다. 25절 말씀을 보면 귀신에 들려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소년은 ‘간질’ 증세까지 있는 중증 환자였습니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이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세상에 의사란 의사는 다 찾아가봤을 것이고, 좋은 약이란 약은 다 먹여 봤을 것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가닥 소망을 가지고 이렇게 제자들에게 아들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요청했으나, 병이 낫기는커녕 그로 인해 서기관들과 제자들이 서로 다투고 싸우는 논쟁거리만 제공했으니… 이 아버지는 무척 심난한 생태 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아들을 데려 왔지만 현장에 예수님은 없었고 제자들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기적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오셨으니 다시 한 번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아들의 증세를 조목조목 알려드리고 있는 것이죠. 특별히 18절 말씀을 보면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거꾸러지다’라는 표현은 ‘내던지다’, ‘땅에 내동댕이 치다’라는 아주 강한 의미입니다. 따라서 귀신이 그를 사로 잡으면 격렬하게 땅에 던져지는 처절한 아들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8절에 ‘파리하여 간다’는 말은 아들이 피골이 상접하여 수척해져 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귀신들린 아들의 육체는 점점 더 쇠약해져 가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에 제자들도 흔쾌히 승낙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전에 귀신을 쫓아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이들은 귀신을 내어쫓는 일에 실패 했습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소년을 자유케 할 힘과 능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서기관들에게 조롱과 비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죠.
모든 사연을 들으신 예수님은 1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You faithless people! (“O unbelieving generation!”) 예수님의 이 탄식은 제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 업음에 대한 강한 탄식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번역 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원문 성경을 보면 “오!”라는 탄식으로 시작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이 세대를 향해 매우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예수님은 믿음 없는 제자들과 이 세대를 향해 책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귀신 들린 아이가 예수 앞에 오매,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심한 발작 증세를 보이며 땅에 엎드려 데굴데굴 구르며 입에서는 하얀 거품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귀신에 의해 심한 경련과 함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죠. 귀신은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러할수록 우리는 예수님을 더욱 바라보아야 합니다. 귀신이 든 이 아들은 쉬지 않고 이리저리 뒹굴며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니 저가 당한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아이 아버지에게 물으십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어릴 때부터니이다.” 오늘 이 단어를 통해 이 아들의 나이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어릴 때’라는 것은 한창 성장하는 유년 시절 입니다. 따라서 유년시절부터 오랫 동안 귀신에게 고통 받아온 십대 청소년 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상생해 보세요. 한 주, 한 달만 아들이 이렇게 귀신이 들린다 해도 어느 아버지가 사는게 어디 사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버지는 지금 귀신들린 아들과 수년간 살아왔습니다. 이 아이가 국민학교 시절부터, 혹은 유치원 때부터 지금 십대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매번 귀신이 저를 불에도 넘어지게 하고, 물에 빠지게도 했습니다. 이 아버지 직장생활 가능 했을까요? 아들 돌보느라 일상생활도 어려웠을 거에요. 평생 소원이 있다면 아들과 함께 단란하게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며 오손도손 이야기 나누는 평범한 일상이지 않았을까요?
22절에 아버지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 (막 9: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지금 아들이 또 다시 예수님 앞에서 발작을 일으키며 이리저리 뒹굴고 있습니다. 긴급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는 예수님께 간절히 요청 했습니다. 22절에 보면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란 말은 긍정반 부정반의 표현 입니다. 지금 이 아버지는 아직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만일 예수님께서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거나 혹은 ‘역량’이 되시는 분이라면 제 아들을 고쳐주십시시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죠. 왜 이 아버지는 예수님의 치유하심에 대해서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염두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부탁 했는데 실패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래도 스승이니까 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예수님도 별 수 없겠지…’하는 불신이 함께 결부되어 있는 것이죠. 그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으나, 여전히 예수님께 자비를 요청 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 반, 의심 반으로 요청하는 아버지를 향해 예수님은 그의 잘못된 간청의 자세를 지적 하셨습니다. 2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에게 믿음을 요청 하셨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다면 이라니!”하고 예수님께서 되물으신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 아버지는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였지만, 예수님은 믿은 자에게는 제한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됨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무에게나 능력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 임합니다. 참된 믿음에는 ‘만일’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입니다. 즉 믿는다는 것은 허상이나 꿈이 아니라, 반드시 현실화될 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시고 이루실 것이란 화신이 믿음 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확고한 믿음을 요청하십니다.
예수님의 지적에 아버지는 그제서야 자신이 믿음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즉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우리들도 이 아버지와 같이 믿음 없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도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 없음을 아뢰며 하나님께 더 큰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믿음의 자세를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합니다. “지난 날 기도해봤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더라. 기도란 그런 것이다.” 이런 식의 불신과 의심을 가지고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시리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리라!” 이런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새벽 하나님께 더 큰 믿음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