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06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마가복음 7장 31-37절)

사람에게 한 가지 장애만 있어도 평생 동안 사는데 많은 불편을 느낄 것입니다. 그 중 사람에게 있어 감각 기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장애는 더 많은 불편을 초래 합니다. 예를 들면, 눈에 장애가 있어 앞을 보지 못하거나, 귀에 문제가 있어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구강 구조에 문제가 있어 말을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할까요? 실제로 일주일 동안만 말 안하고 사려고 해도 의사소통 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고, 일상이 불편해지는지 모릅니다. 듣는 것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전화도 할 수 없습니다. 회의 진행도 지금 보다 4-5배는 더 길어질 것입니다. 감각 기관이 마비 된다는 것은 이처럼 살면서 많은 불편을 가져다 주며, 그의 삶을 제한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듣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 두 가지 장애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벙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언어를 배우다 보니 어느 정도 비슷한 소리로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이야기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사람 대신 예수님께 고쳐 주시기를 부탁 드렸습니다. 여태까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병이 든 자들이 고침 받기를 구할 때마다 말씀으로 그들을 낫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고치시는 모습이 매우 독특 합니다.
3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막 7: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먼저 33절 말씀을 보니,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셨습니다. 즉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병 낫는 현장에 있어도 아무 상관없이 그대로 머물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고치실 때는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시고 그 사람만 있게 하셨습니다. 기적 보기를 원했던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치유하시는 이적을 보게 된다면, 몹시도 흥분하여 예수님께 또 다른 이적을 계속해서 요구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적과 치유에 대한 호기심만을 추구하는 자들을 막기 위해 무리들을 떠나 보내셨습니다.
자, 사람들을 떠나 보낸 후 이제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고치십니다. 아주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몇 번이나 보면서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을까? 말씀만 하시면 병이 다 나을만큼의 권능이 있으신 예수님이신데, 그냥 “병이 나을찌어다” 말씀하시지 굳이 이렇게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비위생적이게 침을 뱉어서 이 사람의 의 혀에 손을 대셨을까?” 제가 무릎을 쳤어요. “아, 내가 어느 순간부터 성경을 3인칭 시점에서 보고 있었구나!” 지금 우리는 이 성경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과 이 병인을 바라보는 시점으로 성경을 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입장을 바꿔서 우리 자신이 바로 지금 예수님 앞에 온 남자라고 한 번 가정해 보겠습니다. 두 귀가 먹었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지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 거에요. 만약 예수님께서 “나는 네 병이 낫기를 원한다. 네 병이 나을찌어다.” 하고 우뢰와 같이 큰 소리로 외치신다고 해도 이 남자는 전혀 듣지 못 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두 손가락을 멀어버린 내 두 귓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주셨어요. 이 당시에 병을 고칠 때, 환자의 아픈 부위에 손을 대는 것은 흔히 행하던 방법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따뜻한 두 손이 귀에 닿을 때 그제서야 이 사람은 “아, 이 분이 나를 고치고 계시구나. 예수님이 나를 치료하고 계시구나?” 하고 깨닫지 않았을까요?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자도 살리시고, 귀신도 내어쫓는 주님이셨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아무 말씀 없이 이 사람의 귀에 손가락을 넣고 계십니까? ‘맞춤형 치료’인 거죠. 지금 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치료 방법으로 주님은 고쳐주고 계신 것이죠. 귀가 안 들리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자야 난 너가 낫기를 바란단다” 하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귀가 들리지 않는 자의 귀에 손을 얹어 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치료의 방법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부정한 자로 여겨서 잘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그 사람 몸에 손도 안 댔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직접 주님의 따뜻한 그 손을 장애가 있는 두 귀에 얹어 주신 것이죠. 그 치유의 손길을 이 사람이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후에도 예수님의 이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생생히 간직하고 살지 않았을까요?
34절 말씀에는 예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막 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여기서 탄식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깊은 한숨을 내쉬셨다는 거에요. “휴우…” 원어 성경을 보면 이 한숨은 ‘매우 답답한 상태에 있다’는 뜻 입니다. 왜 예수님이 지금 답답하셨어요? 평생 귀 먹고 어눌하 말로 살아온 이 사람이 너무 불쌍한 거에요. 아담의 죄의 결과로 인해 이렇게 질병과 고통 속에 아프게 살아가고 있는 한 영혼을 보니 예수님의 마음에 눈물이 차오르는 거죠. 예수님의 탄식은 영혼을 향한 가슴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탄식이었어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예수님 그 다음에 뭐라고 기도하셨어요? “에바다!” (Ephphatha) 열려라! 는 뜻을 가진 아람어 입니다. 에베다는 조금 열리는 것이 아니에요. “완전하게 열려라!” 는 뜻 입니다. “닫힌 귀야 열려라! “혀의 맺힌 것이 풀려라!” 입니다. 지금 이 사람 귀가 막혀 있습니다. 말은 어눌합니다. Stammering, 말을 더듬었어요. 발음도 뭉게지고, 입이 돌아간 사람처럼 발음이 나간거죠.
자, 예수님께서 “에바다! 열려라!”하고 기도하시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5절 함께 읽겠습니다. “(막 7: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닫혀 있던 귀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바다 되었어요. 열렸어요! 혀의 맺힌 것이 풀려 났습니다. 여기서 혀가 맺혀 있다는 말은 그의 어눌한 ‘언어 장애’, 말 더듬던 것이 완전하게 치유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35절에 말하기를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이 어눌하고, 발음이 세던 사람이 이제는 똑바로,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35절에 “말이 분명하더라”는 말은 원어 성경으로 보면 ‘이 사람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본인도 너무 신기한 거에요.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난생 처음으로 ‘소리’라는 것을 그것도 ‘자기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얼마나 신기하고 경이롭겠습니까? “이게 내 목소리구나! 들린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무슨 말이든지 목소리를 내어 계속해서 말해보고 있는 거에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담아가기를 원합니다. 첫째는 한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과 배려 입니다. 예수님은 이 한 사람을 고치시기 위해서 그에게 집중하고자 많은 무리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자에게 직접 손을 얹으시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한 사람을 위해 우리의 삶을 내어줄 수 있다면 반드시 그의 삶에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오늘 예수님의 치유와 회복의 능력 입니다. 37절 말씀대로 예수님은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셨습니다. 37절에 사람들이 뭐라고 예수님을 평가 했습니까? “그는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우리 주님은 못 고치실 병이 없으십니다. 우리 주님 회복하지 못할 인생이 없으세요. 오늘 이 사람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스스로 저주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그러나 예수님 앞에 오자 그의 인생에 놀라운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정확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의 육신만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이 사역을 통해 단절되고 고립되고 외롭게 살아가던 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같이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우리의 시간과 정성을 헌신 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의 어떤 아픔과 고통이라도 예수님이라면 능히 고치실 수 있음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간구하십시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우리 하나님 좋은 것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에바다’의 은혜, 열리는 은혜, 풀리는 은혜, 치료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가득한 하루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