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8 율법의 틀에 갇힌 껍데기 신앙 (마가복음 2장 13-22절)


우리 앞에 두 사람이 서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은 옷을 말끔히 차려 입고 있습니다. 머리도 단정히 빗어 넘겼고, 좋은 향기도 납니다. 이에 비해 다른 한 사람은 여기저기 찢어진 더러운 넝마 같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의 머리를 보니 머리 감은지 일주일이 훨씬 넘었을 것이란 생각마저 듭니다. 그의 얼굴은 씻지 않아서 때가 끼어 까무잡잡합니다. 악취가 납니다. 만일 우리가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면 어떤 사람을 친구로 사귀고 싶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끔하고 깨끗한 사람과 어울리기를 선택합니다. 더러운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상을 쓰게 하고 피하게 만듭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을 두 가지로 구분 했습니다. 정결한 자와 부정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점으로 보면 로마 정부를 위해 동족의 돈을 착취하는 ‘세리’는 부정한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정한 자와 교제하면 자기 자신도 부정해진다고 믿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웬만하면 세리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삭개오의 직업도 세리 입니다. 예수님께서 뽕나무에 올라간 그를 부르시며 그의 집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신다고 말하며 기겁을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세무서 IRS 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한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유대인들과 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깨끗하고 정결한 사람들을 상대하려는 것과 달리, 예수님은 이 당시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 받는 사람들, 욕 먹는 사람들, 사회적 왕따를 당하는 이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보실 때 그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아픈 자를 위해 존재하듯이, 영혼의 의사 되시는 예수님은 죄인들을 치료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복음을 위한 사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지내며 함께 일할 수 있는 영광스런 자리에 초대하신 것이죠.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세리 출신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막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4절을 보니 그는 세관에 앉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관이란 당시 세금을 걷기 위해 세워둔 부스 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레위가 세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는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손에 쥐고 있던 금화와 은화를 모두 내려놓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두어야 하는 세금보다 더 많이 거두는 방법으로 부정재산증식을 한 거죠. 우리는 레위가 어떤 세리였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가 세리가 되었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당시 돈 잘 버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잘 나가던 비지니스 접고 곧 바로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참 대단한 사람이죠? 당시 20대 초반이면 결혼을 거의 다 했었던 유대 문화로 미루어 보아, 레위에게도 분명 가정이 있었고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었을탠데 이렇게 단숨에 자신의 전부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결정을 했으니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며 이토록 자신의 전부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을 우리는 왜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누굴까요? 이 사람이 바로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 입니다. 본래 그의 이름은 ‘레위’ 였으나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란 이름을 주신 것처럼 레위에게도 다른 이름인 ‘마태’를 주신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마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이름을 언급할 때 시몬이라 하지 않고 베드로라고 부르듯이 레위 역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로는 주로 마태라고 불러졌을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지체함 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즉각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그 날 마태는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에 초대 했습니다. 앞서 이야기 했습니다만 세리는 부정한 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마태에게도 친구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평상시 어울리는 사람들이라면 그와 같은 세리들 그리고 또 어떤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차별 당하고 부정한 자라 여기지는 죄인들 뿐이었습니다. 마태는 이 날 자신의 지인들을 많이 초대하여 함께 예수님의 가정 심방을 받은 셈이죠. 이미 세리와 죄인 중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때마침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와 그의 동료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절대로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자와 접촉하면 그 사람도 부정해 집니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염병 보듯이 싫어하고 멀리 했습니다. 이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저주 받은 자로 여겼습니다. 당시 종교적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세리와 죄인들을 더욱 멀리 했던 것이죠. 그러니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의 집에 들어가는 것도 모자라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에 “(막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사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식사를 하는 차원이 아니라, 함께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 합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저주 받은 자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을 보며 놀란 것이죠. 저들은 도대체 왜 예수가 저런 부정한 자들과 함께 교제하려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이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17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건강한 자는 스스로 자신이 의롭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말합니다. 의원은 죄에 빠진 영혼을 치료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왜 자신이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는지 그 해답을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정한 자를 가까이 하면 부정해진다는 율법의 조항들을 가지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예수님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아무런 죄도 없는 척 살며 교만과 거짓 속에 사는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예수님이 가장 필요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을 정죄하기 위해 그가 영적인 일을 한다 하면서도, 금식은 하지도 않고 먹고 마시는 행위를 한다고 정죄 했습니다. 예수님을 걸고 넘어질 것이 없으니까 그가 먹고 마시는 것까지 생트집을 잡는 것이죠. .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는데,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이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 주일에 2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금식하는 것을 의로 여기며 그렇게 살지 않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단죄 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억지스러운 것인지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데 어떻게 결혼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금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한 금식할 수 없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텐데 그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 계신 지금은 제자들이 금식 할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틈틈이 금식하며 기도한 것을 보게 됩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막 2: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생베 조각은 새로운 천 조각 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아직 세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줄어들지 않은 옷감 입니다. 왜 우리가 털실로 짠 스웨터를 세탁하고 나면 사이즈가 줄어들 때가 있죠? 생베 조각 역시 그러 했습니다. 따라서 만일 낡은 옷이 찢어졌다고 해서 새로운 천 조각을 갖다가 대면, 나중에 세탁할 때 생베가 물을 흡수해서 옷이 급격히 줄어들게 됩니다. 그 결과 옷이 찢어지거나 망가지게 됩니다. 여기서 낡은 옷은 유대교를 말하며, 새로운 천 조각은 복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자꾸만 율법에 끼어 맞추려 하면 다른 한쪽이 또 다른 한쪽을 망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시대의 금식 문제를 가지고 복음 시대를 살아가려는 저들의 모습을 경고 하셨습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막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새 포도주는 아직 발효가 되지 않은 상태 입니다. 그러나 가죽 부대 안에서 발효가 시작되면 그 부피가 늘어나게 됩니다. 이 때 새 가죽 부대는 유연하고 신축성이 있어서 부피가 늘어남에 따라 늘어납니다. 그러나 만일 낡은 가죽 부대를 쓰면 포도주가 발효될 때에 늘어나는 부피를 견디지 못하고 곧 터져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은 헌 가죽 부대 같은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합당하지 않으며,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율법이 완성되고 이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는 기쁨의 새 시대가 왔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우리들도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의 형식에 사로 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우리는 내가 지키고 있는 신앙의 형식을 기준으로 나와 같이 살지 않는 다른 성도들과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속은 비어 있고 껍데기만 있는 경건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겉으로는 가장 종교적인 모습으로 살지만, 중심에는 바리새인들처럼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실 때 악한 것입니다. 무엇을 하고 안 하고 하는 행위를 강조하기 보다는 그 안에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담는 것이 중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