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6 나가서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마가복음 1장 40-45절)


문둥병은 전염이 되는 질병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나 지금이나 문둥병 환자는 가족과 사회에서 격리 되어 지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더욱 엄격하게 격리 해서 촌락이 있고 사람들이 사는 성 안이나, 마을 안에는 문둥병자들이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부정한 자로 취급 받아 성전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입니까?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고 계신 예수님 앞에 한 문둥병자가 찾아왔습니다.
오늘 이 본문은 한 병자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최초의 사건 입니다. 이 당시 문둥병자가 정상인에게 먼저 다가가는 행위는 율법 조항을 어기는 일이며,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 죽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 지금 예수님을 찾아올 때 죽을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람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구나… 남은 삶을 지금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삶이 힘들었구나?” 문둥병자가 사람들 앞에 다가오는 것은 율법이 금지한 일이요, 날아오는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었어요.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을 반드시 만나야만 했습니다. 이미 갈릴리 전역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신 예수님, 어떤 질병을 가진 환자라도 예수님께 데리고 가면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문둥병자도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 저렇게 다양한 환자들을 능히 고치시는 분이라면, 혹 나의 문둥병도 고쳐 주실 수 있지 않을까?” 문둥병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귀로만 들었지 아직 눈으로 본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문둥병자는 소문만 듣고 예수님을 만나는 모험을 하고 있는 셈이죠. 예수님 만났는데, 병 못 고쳐주시면 이대로 사람들에게 돌 맞아 죽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은 분명 자신을 고쳐주실 것이란 강한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40절을 보겠습니다. “(막 1: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문둥병자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둥병자가 한 고백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 병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헬라어를 보면 그가 하는 말은 다 현재 진행형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며, 지금 당장 내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분임을 고백 했던 것입니다.
40절에서 문둥병자는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고치다”고 말하지 않고 “깨끗케 하다”는 표현을 기록했습니다. 이 표현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불완전이 낫는 것을 깨끗해진다고 표현 합니다. 두 번째는 죄가 사함 받고 영적으로 정결 해지는 것을 깨끗해진다고 표현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병으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 뿐만 아니라, 그 병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더럽고 부정한 죄인 취급 받고 사는 문제를 겪고 있고 있었던 것이죠. 이 사람은 지금 매우 갈급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자, 어느 날 우리 앞에 문둥병자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면 얼마나 깜짝 놀라겠습니까? 전염병이란 사실을 알기에 손으로 입과 코를 막고 뒷걸음칠 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 하셨을까요? 41절 보시겠어요? “(막 1: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오늘 이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 합니다. 왜냐하면 ‘민망하다’는 이 표현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는 민망하다는 말을 언제 사용합니까? 무언가 사람들 앞에서 창피하고 고개를 들기 부끄러운 상황에 ‘민망하다’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 문둥병자가 싫어서 그를 ‘민망히’여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민망히 여기다’라는 말은 원래 인간의 내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 사람을 보니 내 몸 안의 내장이 찢어지는 듯한 마음, 애타는 마음이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오늘 이 문둥병자를 보셨을 때, 주님은 그 곁에 제자들이 보지 못했던 것도 다 보시고 계셨을 거에요. 오늘 예수님 앞에 무릎 꿇는 이 순간까지 그가 경험한 외로움, 거절, 조롱, 미움, 냉대, 절망, 눈물, 고통… 주님은 그의 마음 속까지 다 보고 계신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자기 앞에 무릎 꿇은 이 사람을 보자 애타는 마음으로 그를 보실 수 밖에 없었던 거죠.
그리고 주님은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놀랄만한 일을 하셨습니다. 41절을 보세요. “(막 1: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제자들과 지금 예수님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경악했습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손으로 만지셨어요.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자를 손으로 만진다는 부정해 집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부정해지는 거에요. 모든 종교의식에서 제외 됩니다. 회당도 못 가고요. 유월절도 참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정도가 아니죠? 문둥병에 감염 될 위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고 이 사람의 몸에 손을 얹어 주셨어요.
예수님의 손이 닿았을 때 이 문둥병자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아마 이 사람도 예수님께서 소문처럼 말씀으로 고쳐 주실 줄 기대 했을 거에요. 왜냐하면 그 누구도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이 걸린 이후로 그의 아버지도 그의 어머니도, 그의 아내도, 그의 사랑하는 아들 딸도 그를 만질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 역시 만지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수 년간 아무도 그의 몸에 손을 댄 적이 없었는데, 오늘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저를 만져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 정도 되시면 말씀만으로도 이 사람 충분히 고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굳이 이 문둥병자의 몸에 손을 얹으셨을까요? 저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사랑해 줄 것 같지 않은 나를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 주님의 사랑은 참으로 위대하고 한계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시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막 1: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그 사람의 믿음대로 즉시 문둥병이 떠나갔습니다. 자, 42절에서도 문둥병이 나았고 고침 받았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깨끗하여진지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단순히 이 사람의 육체적인 치유 만을 해 주신 것이 아니에요. 영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 문둥병자 병이 났고 얼마나 기뻤을까요? 발을 동동 구르며 두 손을 들고 큰 소리로 찬양하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 다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막 1:43)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막 1:44)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예수님 엄히 경계하사 일어난 기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을 읽고 왜 예수님께서 그리 하셨는지 의아해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기적 스토리가 더 많이 전해져야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의 본질이 왜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러셨어요. 자꾸만 사람들이 기적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거에요.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회개와 죄사함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키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꾸만 본질을 잊고, 눈에 보이는 기적만 따르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죠. 또한 아직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아니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것을 강조합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도록 경계하신 것을 여러 차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죠.
예수님은 다만 제사장에게 가서 병이 나은 것을 보여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율법에 기록된 내용 입니다.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이 자신이 나은 것을 깨닫게 되면 그는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 진찰을 받아야 합니다. 그럼 제사장이 그 사람이 다 나았음을 확인해주면 그는 몇 일 후 제사를 드리고 다시 가족과 사회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분이시기에 병이 난 이 사람에게 율법대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러나 오늘 이 사람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45절 보세요.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병이 고침을 받았는지 그 경위를 동네방네 전하고 다닌 거에요. 그러나 그 결과 예수님께서 우려하신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그의 치유와 기적에만 몰두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동네에 공공연히 들어가지 못하시고 마을 밖 한적한 곳에서 복음 전파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문둥병자는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와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가면 주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 응답 받은 후 감정이 너무 앞선 나머지 예수님을 나타내기 보다는 기도한 내 자신의 의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혹은 예수님을 내 죄를 사하신 구원자로 전하기 보다, 내 소원을 이루어주는 분으로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기도는 능력이 있기에 기도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역사는 일어납니다. 그러나 기도 응답이 나온 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겸손하게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방법이 가장 좋은 길 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음성에 순종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가장 좋은 열매가 있을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