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04 선한 일을 위해 지음받은 자 (에베소서 2장 1~10절)

우리 가운데는 태어나 보니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모태신앙으로 신앙생활 하신 분이 계신가 하면, 반대로 예수와는 전혀 상관 없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삶의 어느 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영혼의 구원자로 믿고 예수를 마음에 영접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 예수를 믿었던지, 얼마나 드라마틱한 과정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었든지 상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 모두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 모든 사람은 ‘죄로 죽어 있는 상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시겠어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원자로 믿고 주님으로 영접하기 전, 우리들은 허물과 죄로 인해 영혼이 죽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비록 육신으로는 심장이 뛰고 살아 있었을지 모르나,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죽어 있었습니다. 그럼 육신은 살았으나 영혼이 죽은 자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세상 풍속을 좇았습니다. 2절 말씀을 보세요.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영혼이 죽으면 세상 풍속을 좇아 살아 갑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세상 풍속”이란 “The ways of this world”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삶을 말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영적 세계의 존재를 부인하고, 지금 당장 이 순간 즐길 것들을 중요시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 풍속을 따르는 자들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물질을 중요시하게 생각합니다. 돈과 재물 중심으로 인생의 모든 삶의 우선순위가 세워집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도 “저 사람이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로 판단합니다. 자기 자신의 행복도 “돈이 있으냐? 없느냐?”에 따라 좌우 됩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것인가?”하는 일에 몰두하며 삽니다. 허물과 죄로 인해 영혼이 죽은 자들이 두 번째 특징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릅니다.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세요.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원수 사단을 가리킵니다.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예수를 모르는 자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입니다. 하나님을 증오하고 적대감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대적하게 합니다. 에베소 사람처럼 우상숭배와 마술과도 같은 거짓과 속임수에 현혹되게 합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빠질까요? 조금만 깊게 생각해봐도 저거 거짓인 것을 분별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사람들 뒤에서 역사하는 것이죠. 진리를 외면하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문화와 사상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수년 전부터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는 수 만명의 동성애 찬성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에 대한 반항심과 적개심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영혼이 죽어 있으면, 죄를 깨닫게 하는 양심이 마비되고, 죄를 파악하는 이성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불순종의 영을 따라 살 수 밖에 없는 거에요.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지 않을 뿐더러 할 수도 없습니다. 악한 영의 세력은 강하게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특징은 육체의 욕심을 좇아 삽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절에서는 “너희가”라고 말하던 바울이 3절에서는 “우리도”라고 말을 바꾸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근본적으로 같은 죄인으로서 육체의 욕심, 즉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들을 열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럼 3절에서 말하는 육체의 욕심, 육체와 마음이 그토록 갈망하는 것들 무엇이었을까요?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 육체의 일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이러한 것들을 갈망하며 삽니다.
사도 바울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의 모습을 통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정죄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3절 후반부에 사용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는 말은 죄가 인간의 내면에 내재하고 있기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타락한 성품을 가진 존재임을 가리키는 것이죠.
물고기가 물에서 살 듯이, 영혼이 죽은 자들은 세상의 온갖 불법과 죄악을 먹고 마시고 살아 왔습니다. 어느 면에서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자, 3절까지 이렇게 어두운 내용을 기록하던 사도 바울은, 이제 본질적으로 진노를 받아 마땅했던 우리들이 그럼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기록해 주었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4,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께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어 주셔서 살아 있는 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였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 생명을 얻게 되었고, 죽은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소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 거듭남입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그의 가치관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전에는 “세상에 나 같이 불행한 사람이 없을거야”하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예수 믿고 나니까 “세상에 나같이 행복한 사람이 또 없구나?”하고 감사와 찬양의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갈망이 일어나고, 이전에는 증오했던 그 하나님을 이제는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사랑하게 됩니다. 이런 내적인 변화는 사람의 노력이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는 권세까지 주셨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6절에 ‘일으키다’라는 말은 “부활하다”는 뜻입니다. 이전에 허물과 죄로 인해 이미 죽어 있는 자였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의 새 생명으로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 입니다. 더 이상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단에게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6절 후반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는 것은 과거형으로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현재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지만 이미 믿음으로 하늘에 앉아 있는 것이죠.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며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살려주신 것만해도 엄청난 은혜인데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하셨음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하늘에 앉히신 목적이 바로 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 곧 세상 만대에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본질상 진노의 아들에게 크신 긍휼을 베푸시고, 그 큰 사랑으로 값없이 구원하여 주셨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찬양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은 우리의 공로나 의지나 노력으로 받은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은혜란 도무지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우리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구원받을 만한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의 선행으로는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가 아무리 의로워도 인간이 가진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서 썩은 걸레 같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행위로 구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 받은 것을 마치 내 공로나 내 노력에 의한 것인 것처럼 자랑할 것이 없게 하기 위해서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10절 말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우리는 주님의 Masterpiece 걸작품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없이 구원해 주신 것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진노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름다운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본래 본질상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덧입고,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진노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을 값없이 구원하시고, 놀라운 특권을 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찬양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