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3 주 안에서 기뻐하라 (빌립보서 3장 1절)

중국에 가보면 지금도 옛날에 지어 놓은 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금성처럼 높은 성벽과 웅장한 크기의 규모를 자랑하는 성들이 도시마다 하나 즈음은 세워져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왕들은 성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 안에서만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왕들도 이따금씩 전쟁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서 성을 떠날 때가 있었습니다. 혹은 어느 특정한 지역을 시찰하기 위해서 성을 떠날 때도 있었습니다. 왕이 성을 떠날 때면 왕을 상징하는 깃발이 늘 따라 다녔습니다. 멀리서도 사람들은 왕의 깃발을 보고 그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왕이 어느 성 안에 머물면 그 성 사방에는 왕의 깃발이 꽂히게 되었습니다. 왕이 궁궐 밖으로 나가면 그 깃발이 내려왔습니다. 백성들은 성벽 위에서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왕이 지금 성 안에 있는지 혹은 성 밖에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왕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깃발처럼, 우리 안에 왕 되신 그리스도께서 함께하고 계신지 아니면 안 계신지를 보여주는 깃발과도 같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누군가의 삶에 기쁨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면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계시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첫 번째 열매는 사랑이고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2번째 열매가 ‘희락’ Joy 즉 기쁨 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가득한 삶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기쁨이 넘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빌립보서의 주제를 단 한 마디로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4장 밖에 안되는 이 짧은 편지에 ‘기쁨’이란 단어를 무려 9번이나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읽는 우리는 바울 사도에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정말 나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도 기뻐할 수 있을까요? 나처럼 가난한 사람이 기뻐할 수 있을까요? 나처럼 몸이 병들고 아픈 사람도 기뻐할 수 있을까요? 나처럼 자존감이 낮은 사람, 사업에 실패하고, 사람에게 배신 당하고, 끊임 없는 인생의 문제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도 기뻐하고 있을까요?”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기뻐하라’는 바울 사도의 말에 ‘어떻게 나와 같은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어보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럼 이런 말을 하는 사도 바울은 도대체 얼마나 좋은 상황과 환경에 처해 있었길래 이렇게 자신 있게 “기뻐하라”고 무려 9번이나 말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이 글을 기록하며 지금 편안한 쇼파나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채로, 맛있게 익은 청포도 하나 하나 따 먹으면서 “기뻐하십시오.”하고 쓴 것이 아닙니다. 그는 로마의 감옥에 체포되어 있습니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수의 신분으로 옥살이는 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 춥고 곰팡이 핀 감옥에서 옥사한다고 해도 누구하나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입니다. 끊임없는 힘과 열정을 가진 젊은이였던 사도 바울도 어느새 나이가 들어서 지금은 인생의 황혼녘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의 몸은 병들어 있었고 몹시도 늙어버렸습니다. 힘이 다 빠지고, 눈도 침침하고, 입맛도 예전 같지 않고, 무릎에는 힘도 없고, 온 몸이 늘 뻐근합니다. 그런 인생의 노년에 언제 감옥에서 풀려날지도 모르는 상태로 기약 없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던 것입니다. 스스로 생활하기도 어려워서 교회 성도들이 이따금씩 보내주는 위문품 받으며 지냈습니다. 오늘 그런 그가 자기에게 위문품을 보내준 빌리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며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빌 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여기 ‘종말로’라는 말은 “끝으로”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의 결말, 빌립보서를 통해 사도 바울이 교회 성도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기뻐하라”였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사도 바울은 그 극심한 외로움과 극한 환경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기쁨에 3가지 차원이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육신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배가 무척 고플 때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삼겹살 구워 가지고 쌈에 이거저거 넣어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습니까? 김치찌개 된장찌개 먹고 밥 한 공기 다 먹고 나면 포만감에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이게 뭐에요? 육신적인 기쁨입니다. 무릎이 너무 아파서 계단을 잘 오르지 못했던 사람, 혹은 허리가 너무 아파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어 하던 사람, 그런데 어느 날 의술이나 약을 통해서 병이 나아서 계단도 마음껏 오르락 내리락하고, 마음껏 운동도 하고 산책도 하고 여행도 다니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육체적인 필요가 충족될 때 오는 기쁨이 바로 육신적인 기쁨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초적인 기쁨입니다.
두번째로 도덕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이 돈을 벌 때만 기쁜 것이 아니에요. 내가 가진 것을 사용해서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 삶이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면 그 때 내 마음에 솟아나는 기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 때 우리의 삶이 보람차다고 느껴지고 뭔가 뿌듯한 행복이 있어요. 추운 겨울날 전기도 안 들어오는 달동네에 연탄 나르는 자원 봉사하는 학생들의 표정을 한 번 봐보세요. 힘들어도 뭔가 알게 모르게 행복해 보입니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봉사를 통해서 남을 도와줄 때 얻게 되는 더 큰 행복이 있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도덕적인 기쁨입니다. 도덕적 기쁨이 육체적 기쁨보다 더 오래 갑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이 두 가지 기쁨, 육체적 기쁨과 도덕적 기쁨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상황이 좋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배가 몹시 고프고 피곤한데 먹을 것이 없잖아요? 그럼 육체적 기쁨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아무리 지난 날 저녁 배부르게 맛있게 먹어도 다음 날 일어나면 배에서 또 꼬르륵 소리 납니다. 육체적 기쁨은 오래가지 않아요. 또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힘들 정도로, 일상 생활이 불편할 정도로 허리나 무릎 골반 인대 신경 이런게 아프잖아요? 그럼 막 짜증이 납니다. 육체적 기쁨은 상황에 크게 좌지우지 됩니다. 또 금방 사라집니다. 도덕적 기쁨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도와줄 상황은 커녕 나 하나도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이 되면 사람은 다 한숨 밖에 안 나옵니다. “우리 가족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세상인데 남들은 왜이리 잘 먹고 잘사나? 부럽다 부러워.” 하면서 기쁨이 아닌 좌절감이 찾아옵니다. 육체적 기쁨과 도덕적 기쁨은 상황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이런 두 가지 기준으로 보면 사도 바울도 기뻐할 근거가 전혀 없었습니다. 지금 감옥에 있는데 음식이 뭐 얼마나 맛 있는게 나오겠어요? 아마 매일 똑 같은 부시맨 빵 한 두 조각 물 한 컵이 전부이지 않았을까요? 맛있어서 먹는게 아니라 연명하기 위해 먹는 수준의 식사였을 것입니다. 나이도 들고 머리도 빠지고 몸에 힘도 없고 환경은 불편하고 무엇보다 기도해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지 않아 남아 있는 육체의 가시가 계속해서 그를 찌르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그가 육체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이나 환경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도덕적 기쁨도 마찬가지 입니다. 감옥에서 죄수 신분으로 있다는 것은 삶의 제약이 많음을 의미합니다. 군대가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한 사람도 못 봤습니다. 군인들 백이면 백 다 달력에서 휴가 날짜, 제대 날짜만 체크하고 그 날만 간절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감옥에서 나갈 기약이 없습니다. 감옥이란 환경은 누군가를 도와주기 보다는 그 자신이 누군가에게 기대고 도움 받아야하는 연약한 위치였습니다. 보람차고 알찬 삶을 살 때 얻는 도덕적 기쁨을 찾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육체적 기쁨도, 도덕적 기쁨이 없어도 사도 바울은 여전히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이 기쁨은 도대체 어떤 기쁨이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세번째 기쁨 바로 영적인 차원의 기쁨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진 자, 강한 자가 기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솔로몬 왕처럼 모든 것을 다 누리면서 ‘기뻐하라’고 말했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당신이나 혼자 가서 기뻐하십시오.”하고 욕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가보아도 사도 바울은 상식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기뻐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며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우리 주변을 한 번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인생에 찾아온 고통과 환란 속에서도 여전히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그 누구보다 부자인 것처럼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암 말기라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그 누구보다 건강한 마음을 갖고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감사하며 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 ‘기뻐하라’라고 말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육체적 도덕적으로 기뻐할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전 문맥인 빌립보서 2장 18절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같이 기뻐하라.” 여기서 그는 “나와 같이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그가 목회자이고 선교사이고 좋은 리더니까 의례적으로 “하나님 믿는데 기뻐해야죠.”하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영혼과 인격과 삶 속에 여과되어 자리잡은 참 기쁨의 마음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권면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기쁨은 육체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도덕적인 기쁨도 아닙니다. 그럼 그가 말한 이 영적인 차원의 기쁨은 도대체 어떤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실마리가 바로 빌립보서 3장 1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빌 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기뻐하는데 누구 안에서 기뻐합니까?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표현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가장 많이 반복해서 사용한 표현이 바로 ‘주 안에서’ 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가진 신학사상을 한 마디로 하면 “주 안에서” 입니다. 영어로, “In Christ”. 헬라어로 “엔크리스토스” 입니다. 이 표현이 무려 132번이나 쓰였습니다.
우리가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어 기뻐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조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 안에서’ 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주님 없이 기뻐하는 것은 다 가짜 기쁨이에요. 그런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세상 것들 즐기며 얻는 기쁨은 다 모조품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주 안에서” “주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으면 서나 앉으나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다 무너져 가는 초가산간에 살아도, 아무도 없는 저 무인도에 홀로 외로이 살아도 주 안에 있으면 기뻐할 수 있는 거에요.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 이것이 바로 엔 크리스토스의 기쁨, Joy in Christ 주 안에서의 기쁨 입니다. 우리 안에 이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육체적인 기쁨이 있어야만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잘 되고, 돈 잘 벌고, 몸이 건강하고 꼭 이런 조건들이 충족될 때만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압니다. 이런 것이 다 없어도, “무화과나무가 싹이 트지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해도, 올리브 나무에서 수확할 것이 없고 밭은 먹을 것을 생산하지 못해도, 우리 안에 양 떼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다 해도… 주 안에 있으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난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 / 난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 / 난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 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울고 짜증내고 화를 내는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가 주님 안에만 있으면 우리는 여전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보면 천성적으로 우울한 기질을 갖고 태어난 분들이 계세요. 막 그 사람 가까이만 가면 왠지 내 기분도 같이 우울해지고 삶이 막 불행해지는 것 같은 에너지를 줍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그 스스로 자생적으로 영적인 기쁨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존재 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가만히 두면 저절로 좋지 않은 것만 생각합니다. 여러분 내일 하루, 다음 주 생각하면 막 웃음이 떠오릅니까? 아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과 염려가 떠오릅니다. 우리의 본성은 자꾸만 어둡고 불안해하는 쪽으로 마음과 생각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요 의도적으로 어떤 조건과 상황에 상관없이 기뻐하는 것을 훈련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말부터 바꿔야 해요.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 중에 힘들면 툭 튀어나오는 말이 있어요.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힘들어 못 살겠네.” 이미 말부터 부정적이죠? 사람의 뇌는요 자기가 말한대로 몸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말에는 힘이 있어서요 사람이 그 말에 지배를 받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하는 말에 엄청난 힘이 있다는 거 알고 계세요? 사람이요 노래 한 자락만 불러도요 기분이 바뀝니다…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수 없네… 저기 개똥 무덤이 내 집인걸… 가지마라 가지마라 가지 말아라…” 이런 노래면 갑자기 인생이 뭔가 혼자인 것 같고… 뭔가 지난 날 삶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가면서 말 그대로 울다 잠드는 거에요. 하나만 더 하면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 열차에 흔들리는 차장 넘어로 빗물이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르고 잃어버린 첫 사랑도 흐르네” 막 이런 노래 부르면 갑자기 옛날 그 사람 생각나는 거에요. “그 때 나에게 그만 만나”하고 돌아서던 그녀 “그녀는 지금 잘 살고 있을까?” 그녀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 비는 주적주적 내리던 다리를 건너오던 그 날 밤… 막 지나온 날의 감정들이 떠 오릅니다. “그녀는 잘 살고 있을까?”
그런데요 반대로 우리가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이런 찬양 부르면 어때요? 우리 안에 천국 소망이 생기는 거에요. 그래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뭐가 대수냐!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데 뭐가 걱정이냐!?” 찬양 한 소절에 사람이 자기가 가진 삶에 대한 자세가 바뀌는 거에요. 여러분 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람은 자기가 말하는대로 살게 되어 있어요.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일이 더 많아지게 되고, 반대로 불평이 많은 사람은 남을 더 원망할 일들만 생기게 됩니다. 그게 말의 힘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먼저 말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 죽겠다.”가 아니라 “아, 그래도 감사하다.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게 다 하나님 은혜지. 나 보다 힘든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나를 이렇게 보살펴 주시니 주님 감사합니다.” 말에서 먼저 승리하면 내 마음도 생각도 저절로 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어 기뻐하는 것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여태까지 힘들고 어려우면 무의식적으로 불평하고 화내고 짜증내신 분들 계시죠? 이제라도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말부터 바꾸세요. 힘들면 힘들수록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세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기뻐할 조건이 없다 해도 좋은 일만 생각하고, 감사한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에서 힘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가지면 그런 기대를 가진 자녀들에게 하나님은 더 크게 응답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기대를 해야 기도를 하죠. 그러나 반대로 자꾸 안 될 일만 생각하고 어두운 것만 생각하고 극단적인 생각 죽을 일만 생각하면 반드시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는 것을 계속해서 훈련해야 합니다.
정말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요 고난 중에도 감사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기에 자신의 생명이 오락가락 하는 위기 상황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로 기도할 수 있는 거에요. 그러나 이처럼 우리의 삶에 기쁨의 깃발을 펄럭이는 삶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상시에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래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구나?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께 감사하자!” 부정적인 말 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하고, 불평하는 말 보다는 감사의 말을 하고, 남을 죽이는 말이 아니라 위로와 힘을 주는 말을 하십시오
오늘 직면한 우리의 상황과 환경이 아무리 힘겹고 희망이 없어 보여도 주님 때문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기에 “주 안에서” 기뻐하시기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더 큰 감사의 이유들, 기뻐할 이유들을 우리 삶에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 기뻐하는 자에게 // 기뻐할 이유를 // 반드시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이 힘드시죠? 많이 어려우시죠? 그래도 포기하지 마세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 하세요. 주 안에서 기뻐하시는 삶을 끝까지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