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06 한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장 1-4절)

본문 1-4절을 한 문단으로 보면 원래 기록된 헬라어와 다르게 해석이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은 마지막 구절인 4절부터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빌 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4절의 마지막에 있는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이 표현이 사실 가장 앞에 있어야 합니다. NIV 성경을 보면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이 구절이 4절 말씀이 아니라 2절에 가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을 본래 원어인 그리스어에 맞게 다시 변경하여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는…” (x2) 오늘 본문은 사실 이 구절이 가장 먼저 나와야 합니다. 즉 오늘 본문은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이런 요소들이 필요하다.”고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 문단에 나타난 내용들이 바울의 마음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유럽에서 알아주는 교회로 성장해 가고 있었습니다. 교계 신문이 있었다면, 커버에 교회가 실릴 정도로 전에 없었던 영적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마 오늘날 같으면 주변 교회 목회자들이 이 교회가 가진 부흥의 비밀이 무엇인가 하고 교회 탐방을 갈 정도로 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빌립보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성도들간의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유오디아 권사와 순두게 권사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자주색 옷감 장수 루디아의 회심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빌립보 교회가 “여성 리더 중심의 교회가 아니었을까?”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유 권사와 순 권사의 싸움은 단순히 둘 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내분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분열과 내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자녀들이 서로 기쁠 때나 힘들 때나 함께 돕고 위로하며 우애 있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참 좋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명문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 들어가서 돈을 많이 벌어도 형제끼리 집안 경조사 때 누가 돈 얼마를 내야 하냐 때문에 눈치 보고, 서로 누가 부모 재산 더 많이 가져가나 때문에 다투고, 신경전을 벌이면서 서로 언성을 높이고 욕을 주고 받으며 싸운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사실 이런 경우들이 실제로 많지 않습니까? 같은 부모 뱃속에서 태어났는데 평생 연락 끊고, 남남이 되어서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모르고 사는 안타까운 경우도 많습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들이 이처럼 서로 싸우고 반목하고 지내면 가슴이 참 아픕니다. 부모 마음에 염려만 가득 쌓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늘 아버지 이십니다. 그의 자녀들인 성도들이 기쁠 때나 어려울 때나 서로 격려하고 위로해주고 축하하고 도우며 우애 있게 사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도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도들이 서로 헐뜯고 뒤에서 욕하고 싸우고 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리 없습니다. 성도들이 한 마음을 품고, 서로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며 지낼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권면 했습니다. 교회가 어떤 가치보다도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바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하나 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로 하나 되어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영적으로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빌 2: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우리는 2절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교회의 하나 됨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라.” “같은 사랑을 가져라.” “뜻을 합하라.” “한 마음을 품어라!” 어찌보면 너무도 비슷해 보이는 명령을 사도 바울은 반복적으로 함으로서 빌립보 교회에게 하나 되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마음을 같이 하라”는 표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래 이 표현을 그리스어로 보면 ‘같은 생각을 가지라’, ‘같은 것에 전념하라’ 입니다. 왜 교회가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까? 생각이 다르면 행동하는 것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한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요? 2절을 보니 “같은 사랑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쓰인 ‘사랑’이란 단어가 바로 ‘아가페’ 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할 때 쓰인 단어 입니다. 성도가 성도를 사랑할 때 세상적인 차원의 사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상대방의 자격과 조건을 따집니다. “저 아무개 집사님은 내가 볼 때 센스가 좋아. 말도 예쁘게 하고. 옷도 멋있게 잘 입어. 가까이 가면 냄새도 좋은 냄새가 나.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해. 그러니까 내가 사랑해야지.” “저 아무개 집사님은 어쩜 저렇게 싫지? 말하는 것도 너무 얄밉고, 사람이 교양이 없어. 어렸을 때 가정 교육을 잘 못 받았나봐. 하는 짓이 꼴도 보기 싫어. 그러니까 저 사람은 내가 사랑하지 않을거야.” 이렇게 상대방을 내가 가진 잣대와 기준으로 평가해서 저 사람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따지는 것이 바로 세상적인 차원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세상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여 사랑하는 것은 교회 안 다니는 불신자도 합니다. 내 마음에 들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고 한 교회로 모이게 하셨을 때 우리에게 상대방의 자격과 기준을 보고 사랑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세상적인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 에게 남긴 가장 마지막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는데 누가 누구를 사랑한 것처럼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형제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어이고, 마태 너 예루살렘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수석으로 졸업했구나. 내가 너 사랑한다.” “야, 베드로 너 팔에 근육을 보니까 힘 좀 쓰겠구나? 내가 너 사랑한다.” 주님 이렇게 자격이나 조건 보고 사람들 사랑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사랑 하시는데 있어서, 그 사람의 능력이나 그 사람이 가진 재산이나 그 사람의 아이큐 같은 것을 보고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다면, 우리 중 그 누가 예수님의 기준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도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 가난하고,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가장 평범한 갈릴리 어부들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욱 하는 다혈질 기질을 가진 베드로, 높은 자리 차지하고 싶어서 툭 하면 어머니 데리고 와서 아부하는 야고보와 요한, 의심이 많은 도마, 예수님 이용해서 로마 점령하려고 꿈꾸는 야망인 가룟 유다… 말이 좋아서 열 두 제자고, 열 두 제자지 인간적으로 보면 사실 우리가 보아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사람을 보고 살아 할지 말지 결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먼저 사랑하는 눈으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하고 은 30냥에 대제사장들에게 자신을 팔 것까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끝까지 자기에게 주어진 제자들 사랑하셨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 보면, 우리 마음 어렵게 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지금 없는 것 같으면 잠시만 기다리시면 꼭 나타날 것입니다. 말로 우리를 시험 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집사님은 말을 꼭 저렇게 해야 하나? 저렇게 밖에 말 못하나?”하고 말로 우리 마음 어렵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우리가 하는 일마다 반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교묘하게 우리 괴롭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나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만 은연 중에 나에게 큰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마음이 어떻습니까?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싫습니다. 나중에는 말을 섞는 것도 싫고, 쳐다보기도 싫어집니다. “세상에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교회 집사고, 교회 장로고, 교회 목사지?” 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게 합니다.
빌립보 교회가 지금 그런 상황입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권사지?”하면서 유오디아 권사하고 순두게 권사가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바울이 보니까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평상시 그 누구보다 교회 일 열심히 하던 두 사람이 싸우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도 다른 사람들이 싸울 줄 알았는데 어떻게 교회에서 가장 앞장 서서 섬기는 리더들인 저 둘이 싸우고 있나…”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사단의 전략입니다. 교회 나온지 얼마 안되는 새가족들 둘이 싸웠다… 뭐 큰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사실 교회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두 리더가 싸우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교회 전체가 분열되고 내분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원수 사단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할 수 있는 대로 교회의 리더들 사이에서 미움과 다툼이 일어나게 만듭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대로 교회는 절대로 외부적인 이유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는 연약하여 스스로 내부적인 이유들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미움과 다툼으로 인한 교회의 분열 입니다. 목사와 부목사가 싸우고, 목사와 장로가 싸우고, 장로와 장로가 싸우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사단이 주로 쓰는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이처럼 분열되는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계속해서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심어야 합니다. 사랑 받을 자격 없는 자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실 때 어떤 자격이나 조건도 보지 않으셨지.. 나도 저 집사님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다 계산기 두들겨보고 셈하고 따져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먼저 사랑하기로 선택하고 바라보자.”
또한 우리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람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 내가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던가? 나만큼 부끄러운 인생을 산 사람이 또 있을까? 나처럼 자주 넘어지고 자주 실패하는 사람이 있던가? 나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대못을 박은 사람도 없을꺼야. 그래도 주님 여전히 이 부족한 날 사랑하시지… 그렇다면 나도 저 사람을 사랑하자. 비록 저 사람이 내 마음에 대못과도 같이 아픈 상처를 박았지만, 나를 위해 손과 발에 더 큰 못을 박으신 주님의 사랑 받았으니 나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저 아무개 집사님 사랑 해야지…”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같은 사랑을 가지고”라고 권면 했습니다.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아가페 사랑을 본받아 형제 자매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한다면 이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성령의 공동체가 될 것 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희생하고 섬길 때 하나님께서 참된 기쁨과 평안이 주어질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세워주고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사랑 가득한 가정과 교회가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