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04 도리어의 은혜 (빌립보서 1장 12-18절)

본문을 기록한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바라보며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럴만도 합니다. 지난 4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고, 죄수로 살았습니다. 군대 3년도 죽을 맛인데 4년간 감옥에 있었으면 우울증 걸려도 이해할 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기를 도리어 기회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고백했습니다. 12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복 된 눈이 있었습니다. 여기 ‘도리어’라는 단어에 동그라미를 한 번 쳐 보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자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바울이 보여준 이 믿음의 자세를 가리켜 ‘도리어의 신앙’ 혹은 ‘도리어의 은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나쁠 수 있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울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몹시 힘든 상황일 수 있습니다. 혹은 몸이 건강하지 않아서 질병으로 여러 해 동안 고생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비즈니스가 전과 같지 않아서 이익이 줄어서 마음 고생이 있을 수도 있고, 가정에 일어나는 배우자와의 문제 때문에 혹은 내 맘 같지 않은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게 다 지금 우리들이 처한 상황이고 환경입니다.
이러한 상황과 환경만 보고 살면 우리 중 낙심하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힘들고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일하고 계신 섭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 우리 집이 가난하니까 도리어 이 가난이 나로 하여금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는구나? 이게 주님의 뜻이지…” “그래 내 몸이 약하니까 도리어 내가 주님을 더 찾게 되는구나… 아무 문제도 없고 몸도 건강했으면 내가 얼마나 교만 했을까? 얼마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세상 속에서 살아갔을까? 이것도 다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었구나? 주님 감사합니다.” 상황과 환경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난 위기와 역경을 통해 ‘도리어’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만지고 계시고, 내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리어의 은혜를 고백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창세기에 나온 ‘요셉’입니다. 그는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형들에게 속고 배신 당해 애굽의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게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하감옥에 갇혀야만 했습니다. 웬만한 사람이었으면 매일 밤 서러워서 울고, 외로워서 울었을 것입니다. 훗날 요셉의 형들은 그들의 동생이 서럽고 억울한 날들을 기억하며 언젠가 가까운 시일에 복수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 내 삶에 찾아온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아름답게 꽃 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수 있는 인생의 태도가 바로 ‘도리어의 신앙’입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을 축복하며 말했습니다. “(창 49:24) 요셉의 원수들이 무섭게 그를 공격하며 활을 쏘고 추적하지만 (창 49:24)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 입음이라.” 요셉은 10대 때는 애굽의 노예가 되었고, 20대 때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하감옥에 갇혀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진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도리어의 은혜’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우리 인생에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이 찾아오지만, 도리어 하나님은 그 고난과 역경 속에서 주님의 뜻을 놀라운 섭리를 통해 이루어가시고 계십니다.
로마 감옥에서 죄수로 지내던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갇혀 있음을 통해 도리어 하나님의 복음이 로마의 고위관리자들과 시위대 안팎으로 증거 되는 것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신묘막측하신 방법으로 일하고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14절 입니다.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가만히 보니까 어떤 사람들은 착한 의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였고,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악한 의도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착한 뜻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이와 같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열심으로 복음을 전하시던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이 감옥에 붙잡히시다니?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던 말인가? 그래, 이렇게 어려울 때 나라도 더 분발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계속해서 증거 되도록 해야지. 그래서 바울 목사님이 이와 같은 소식을 감옥에서 듣고 위로를 받으시도록 해야겠다.” 참 좋은 의도입니다. 그러나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은 왜 복음을 전했습니까? 15절을 보니 ‘투기’와 ‘분쟁’으로 했습니다. 이들은 평상시에 사도 바울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저를 비난하며 “저거 봐라.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이야. 저 사람은 아마도 사도가 아닐꺼야. 이 기회에 내가 더 그리스도를 열심히 전해서 사도 바울의 명성을 뛰어 넘어야 겠다.” 겉으로 보면 하는 일은 복음전도인데 그 내면의 의도가 불순합니다.
이게 무슨 애들 장난인가 싶지만, 사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이런 모습이 자주 나타나지 않습니까? 장로 선거 때 되면 후보에 오르는 사람들이 교인들 더 자주 만나서 밥 사주고 선물 사주고 평소보다 더 친절하게 대해줍니다. 사람들이 모를 거 같죠? 평상시랑 하는 것이 다를 데 왜 모르겠어요. 다 알지만 말 안하는 것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투표 끝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들을 보면 이렇게 장로 투표를 앞두고 반짝이는 후보자들을 보면서 막 화를 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그러면 안 되죠. 직분자 투표가 있던 없던 평상시에도 성도들을 잘 섬기고, 하나님이 직분을 주시면 더 두려운 마음으로 성도들을 섬겨야 정상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의도를 가지고 섬기는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 시대 뿐만 아니라 바울의 시대에도 있었어요. 그들은 바울 보다 더 인정받는 인물이 되기 위해 더 열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불순한 의도로 그렇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이러한 실수들을 얼마나 자주 저지릅니까? 아무리 겉으로 하는 일이 좋아 보여도, 그 속의 의중은 시커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런 사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뿐입니다. 나중에는 반드시 교회 안에서 다툼과 분열을 일으킵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 전하는 이들의 소식을 듣고 얼마나 화가 났을까요? 아마 너무도 황당해서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그래 저 사람이 착한 의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든지, 악한 의도를 가지고 전도하든지 결국에는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구나? 그럼 되었지.” 1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여기 마지막에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글성경을 보면 둘다 현재형으로 쓰여 있습니다만 사실 이것은 시제가 다릅니다. 원문을 보면 첫 번째는 “내가 기뻐하리라”가 맞습니다. 그런데 뒤에 기뻐하리라는 조금 달라요. 영어로 먼저 말해보면 “I will continue to rejoice” 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기뻐하리라” 입니다.
감옥에 갇혀 고난을 당하던 사도 바울,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어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바라보았습니다. 역경과 어려움이 가득하지만 도리어 그를 통해 복음의 역사를 완성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기뻐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기뻐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긴 시간 감옥에 갇혀버린 바울처럼 오랜 세월 이어지는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혀를 차고, 고개를 가로 저을만큼 그 고난이 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경과 고통 속에서도 도리어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 도리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어 일하고 계신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고난과 환난 속에서도 바울처럼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