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22 감사하러 주님께 돌아오다 (누가복음 17장 11-19절)

인도에는 ‘카스트제도’라는 신분제도가 있어 사람들을 차별합니다. 4개의 신분 중 가장 낮은 계급이 바로 ‘수드라’ 입니다. 이들은 인도 사회에서 천대 당하고 사람들로부터 늘 천대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옛날 조선 시대 때 백정을 천대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인도의 카스트 제도의 가장 아래에 있는 ‘수드라’보다 더 낮은 계급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널리 책으로 알려지면서 세상을 놀라게 한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달리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여태까지 ‘달리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세상은 잘 몰랐을까요? 그것은 ‘달리트’ 신분을 가진 이들이 ‘불가촉천민’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불가촉천민”이란 말은 ‘만질 수 없는 천민’이란 뜻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들은 너무도 더럽고 천한 신분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물건을 만질 수 도 없고,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표현할 수도 없고, 다른 이들을 쳐다 볼 수도 없고, 다른 이의 집이나 그림자에 접근할 수도 없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밝은 대낮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시간에는 숨어서 살아가다가, 저녁에 거리에 나와서 살았습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란 화장실에 있는 분뇨를 청소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달라트가 다녀간 길은 더러워진다고 여겨왔기 때문에 항상 빗자루를 등에 지고 가면서 자기가 걸어간 길을 쓸어야만 했습니다.
신약성경이 배경인 유대사회에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신분제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달리트’처럼 ‘불가촉’의 존재, 즉 ‘다른 이나 물건들을 만질 수 없어 숨어 살아가야하는 존재’로 여겨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문둥병자’들입니다. 문둥병은 몸을 썩게 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코가 녹고, 귀가 녹고, 입이 녹고, 손과 발이 녹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질병입니까? 이 병이 더 무서운 이유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전염이 되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둥병에 걸리면 가족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도시에서 쫓겨나서 동굴이나 광야에 따로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만일 문둥병자들이 몰래 도시에 들어오면 돌에 맞아 죽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한국에서도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을 소록도라는 섬에 격리시켜 두었습니다. 요즘에는 문둥병이라 하지 않고, 나균을 발견한 노르웨이 의사 한센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이라고 합니다. 다행이도 오늘 날 한센병은 약으로 치료할 수 있으며, 환자들은 병이 치료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약을 먹으면 음성 판정을 받아 가족들과도 생활이 가능합니다. 이제는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소록도를 다리로 연결 해 두어 왕래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의 이야기지 신약시대의 배경이 되는 2 천년 전에는 이야기가 전혀 다릅니다. 문둥병자 한 사람으로 시작된 나균이 전염되면 마을 전체가 죽거나 심지어 한 나라가 사라질 수도 있는 위험한 질병입니다. 오늘날 가장 무서운 질병을 에이즈나 암이라고 본다면, 신약 시대 가장 무서운 병이 바로 문둥병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문둥병에 걸려 예수님께 가까이 나가지 못하는 나병환자 열 사람이 멀리 서서 예수님을 향해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병환자들은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이죠.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눅 17: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나병환자가 함부로 사람들 사는 마을에 출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예외조항이 있습니다. 바로 환자가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발견하여 제사장에게 그 사실을 확인 받기 위한 경우 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아직 나병이 있는 환자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너의 몸을 보여주라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병이 이미 다 나았음을 믿고 제사장에게 가라는 믿음의 도전이었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제사장을 찾아가게 되었고, 가는 도중에 자신들의 몸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그 다음부터 펼쳐집니다. 15-16절 말씀 ”(눅 17: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 17: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린 환자가 장시간의 수술을 통해 자신의 몸이 나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수술을 집도한 의사를 찾아가 고개라도 숙이고 그에게 감사인사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문둥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 인사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열 명 중 아홉 사람은 각자 갈 길을 갔고, 오직 한 사람만이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했습니다. 16절 말씀에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씀을 더 쉽게 해석하면,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절하면서 감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고침 받은 환자는 열 사람인데, 오직 이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 있었을까요? 어쩌면 평생 꿈 같은 소원이 이루어졌기에 한 시라도 보고 싶은 빨리 가족들을 만나고,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형제자매들 혹은 자녀들을 보고 싶어 한 걸음에 달려 갔나 봅니다. 그들은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께 신경 쓸 여유가 없던 것이죠. 아홉 명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도 예수님께 다시 찾아오지 않은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와 핑계거리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 어떠한 명분과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눅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에 도무지 감사할 줄 모르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의 입장이 되어 보면 분명히 그들도 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모습이라면 그 자체가 고쳐야할 모습입니다. 개인적인 욕망이나 계획을 뒤로한 채, 먼저 자신의 병을 고쳐준 예수님을 찾아 급히 돌아온 이 한사람에 비하자면, 아홉 사람은 너무나도 미숙한 수준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시 한 번 15-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눅 17: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 17: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이 사람이 예수님께 어떠한 자세로 감사를 드립니까? 먼저 15절에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기쁨, 큰 감사를 마음 속에 감출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이죠. 16절에는 “예수님의 발 엎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줄여 말하면 경배 입니다. 요즘에 우리들은 입술로도 감사를 잘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마음을 다하고 행실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다른 아홉 명은 더 시급한 일이 있어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 한 사람만큼은 만사를 제쳐두고 예수님을 찾아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감사를 드린 이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또한 그의 깊은 감사를 받으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또 얼마나 행복하고 뿌듯 하셨을까요?
감사는 이처럼 나누는 자나 받는 자나 모두를 다 기쁘고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의 삶은 복이 넘쳐 납니다. 감사하는 가정은 화평이 머뭅니다. 감사가 넘쳐나는 교회는 시험 거리가 없습니다. 감사가 넘치는 공동체는 낙심과 절망도 절대로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만드는 유익이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고침을 받은 열 사람 모두 쉽지 않은 상황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문둥병자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은 주님께 나아와서 무릎을 꿇고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이 사람을 보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그에게 이르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하죠? 이 사람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왔는데 예수님은 너의 ‘감사’가 아니라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로써 감사가 바로 그가 가진 믿음의 씨앗에서 비롯된 열매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믿음의 열매 입니다. 믿음이 감사를 낳은 것입니다. 참 믿음이란 것이 구체적인 말과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의 열매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매우 어려운 정치적 경제적 위기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여기 있는 우리들은 긴급한 일들에 노출되어 있고, 항상 분주한 일들로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힘겨운 시대 속에서도 ‘감사하는 삶’은 놓치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주님께 달려와 하나님께서 내 삶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는 감사의 수준을 더해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열매인 감사를 보시고 더 큰 감사의 열매를 맺도록 크신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그 동안 감사 드리지 못한 핑계거리가 있지는 않았습니까? 다른 일들에 분주하여 하나님께 나와 감사 드리는 일을 등한시 하지는 않았습니까?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언제나 삶의 현장 속에서 감사의 꽃을 활짝 피우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