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9-10장의 긴 지면을 통해 욥은 자신의 결백함과 의로움을 친구들에게 변론했습니다. 자신을 이러한 고난을 당할 만한 그 어떠한 죄도 짓지 아니하였으며, 하나님께 자신을 괴롭히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그만 멈추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차라리 죽게 내버려 달라고 까지 말합니다. 욥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말까지 했겠습니까? 한참 욥의 말을 듣고 있던 세 번째 친구 소발… 안타깝게도 그 역시 나머지 두 친구들처럼 욥을 위로하기 보다는 욥을 질책합니다.
“(욥 11:2)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욥은 자신의 처지를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소발은 오히려 말이 많은 욥이 어리석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소발은 자신이 어리석은 욥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소발이란 사람의 성격을 보게 됩니다. 친구라는 사람이 욥의 고통 때문에 위로 해주기 위해서 입을 열기는커녕 아파하는 친구를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며 그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고 하는 소발은 참 냉정한 사람입니다. 친구의 진심도 헤아려 주지 못하는 이 사람이야말로 미련한 사람 아닐까요? 소발은 욥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평가 했습니다.
“(욥 11:4)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소발은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욥이 사실은 자신의 죄를 감추고 헛된 말을 악의적으로 뱉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소발의 눈에는 욥이 거짓말쟁이로 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소발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욥을 폄하합니다. “욥 너가 그렇게 의롭다고 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죄를 지었으면 어서 실토해라!”는 식으로 소발은 욥을 질책합니다. 6절 후반절에 그는 말합니다.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 소발 참 무서운 사람입니다. 지금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열 자식을 잃어버린 친구 욥에게 하는 말이 “너는 이거보다 더 큰 재난을 당해야 마땅했어!”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너를 불쌍하게 보셔서 너의 죄보다 가벼운 벌을 주신 거야. 이 정도면 양호한 줄 알아!”하고 욥에게 말하며 욥이 결코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할 처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을 죄인으로 단정짓고 그에게 이야기 하는데, 그 중 소발이 가장 욥을 나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의 말은 무정하고 잔인합니다. 소발은 지금 욥이 받고 있는 고난이 작은 것이라고 말하며, 만일 욥이 이대로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결백만 주장한다면 하나님께서 더 큰 형벌을 내리실 거라고 경고와 협박까지 한 셈입니다.
7절부터는 소발이 욥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데, 너까짓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느냐는 식의 어투를 사용합니다. “(욥 11:7)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욥 11:8)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소발은 욥에게 지금 따지듯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 아까 너가 하나님 보고 ‘나는 의로운데 왜 나를 괴롭히십니까?’라고 말했지? 너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어떻게 다 측량하겠니? 너가 어떻게 전능자의 뜻을 다 알겠어? 너가 하늘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다 알겠어? 음부보다 깊으신 주님을 어떻게 다 이해하겠어?” 소발은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욥의 한계를 대조하며, 겸손한 태도로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9절, “(욥 11:9)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우리가 사람의 키를 재거나 물건의 크기를 잴 때 자를 사용하죠? 하나님의 크기는 무엇으로 잴 수 있을까요? 9절에 ‘그 도량은’이란 말은 하나님의 뜻과 지혜의 크기를 재기 위한 물건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다고 한 것은 크신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결국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소발은 욥에게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강조하며, 욥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땅콩보다 작은 존재이니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는 식으로 욥을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욥에게 일어난 재앙이라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 일인데 어찌 욥이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틀렸다고 이건 아니라는 식으로 뭐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러면서 동시에 다시 한 번 욥이 이렇게 고통 당한 것은 그의 죄 때문임을 지적합니다. 11절 말씀, “(욥 11:11)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여기서 소발이 말한 ‘허망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소발은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함으로 하나님께 신성모독적인 일을 했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죠. “욥 자네가 앞서 말한 것은 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네. 하나님은 악한 일을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시지만 다 보고계셔!” 이 말은 즉슨, 욥의 은밀한 죄를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오늘 욥을 향한 소발의 질책 그 크라이막스는 12절 입니다. “(욥 11:12)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12절은 소발이 욥을 대놓고 모욕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걸 쉽게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욥 11:12) 미련한 사람이 지혜로워지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들나귀가 사람 낳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 걸세.” 누구보고 하는 말입니까? 고대 근동에서 들나귀는 가장 교만하고 미련한 동물로 여겨집니다. 지금 소발이 욥에게 하는 말이에요. “자네가 바로 교만하고 미련한 들나귀였구만!” 영어 성경에는 들나귀를 당나귀 혹은 노새로 번역 되어 있습니다. 혹시 당나귀나 노새 우는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사람은 그게 무슨 말인지 당 채 알 수가 없습니다. 소발은 지금 욥이 하는 말들이 다 이렇게 아무 의미 없는 들나귀의 울음소리 같다고 빗대어 조소한 것입니다. 참 욥기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욥의 친구들이 얼마나 정 없고, 냉정한 사람들인지 꺠닫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정말 친구인지 의심이 될 정도 입니다.
욥기가 읽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세 친구의 글들이 계속 이어지다보니까 어느 내용에서 은혜를 받아야 하는지 골라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원자력 기술이란 것이 잘 적용되면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줍니다만, 그것을 잘 못 사용하면 엄청난 해악과 인명피해가 일어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진리는 우리의 영혼을 자유케 합니다. 그러나 칼 같이 날카로운 진리를 가지고 상대방을 정죄하고 해하려는 욥의 친구들은 욥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가져다 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11절 말씀대로 ‘(욥 11:11)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하나님은 이 모든 광경을 다 보시고 진짜 누가 미련한 자인지, 누가 악한 자인지 다 판단하고 계셨습니다. 소발이 지금은 옳은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그는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행위가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그것은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내 배우자, 내 가족, 내 직장 동료 혹은 다른 누군가가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유심히 지켜보고 계신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판단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일을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 해도 다 보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가 행한 대로 하나님은 선과 악을 심판 하십니다. 오늘 이 하루 우리의 삶을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삶으로 들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